창백한 얼굴로 숨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고요하게 잠들어있는 어린 동생의 뺨을 쓸면서 마리아는 지금 옆방에서 잠들어있을 야생동물 같은 남자를 떠올렸다. 잘 그을린 건강한 구릿빛 피부, 끝이 치켜 올라가고 선이 짙어 유난히 매서워 보이는 눈, 나름대로 예의를 지키기 위해 걸친 의상 아래 단단히 긴장해있던 몸. 흉흉한 가족들의 기세에도 밀리지 않고 되레 이를 드러내던 ……그것을 무어라 지칭해야 할까. 야생성? ……무슨 짐승도 아니고, 흉포함? 야생성이나 흉포함이나. 음… 자존심. 이게 가장 잘 어울리려나. 실크처럼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정리해주며 그녀는 그것을 자존심이라 부르기로 결정, 혼자 고개를 끄덕거렸다.
바쁜 촬영 일정이 끝나고 드라마도 1부에서 단테가 등장하는 신 부분은 모두 완료되었다. 1부 완결까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어서 숨도 돌릴 겸 크루즈 여행을 한다고 했던가. 평소대로라면 그런 파티나 행사 따위 참여하지 않고 얌전히 집으로 돌아와 늘어졌을 텐데, 이상하게도 이번에는 단테가 먼저 여행에 참가할거라고 통보해왔다. 깜짝 놀란 가족들이 그동안 외지 촬영이라 얼굴도 못 봤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냐며 당장 달려왔지만 이미 단테는 짐을 싸서 케빈과 함께 크루즈에 올라타 버린 이후였다. 별달리 알아서 스스로를 챙기는 일이 없는 단테지만 하겠다고 한 일에는 누구보다 빠르단 말이지. 그런 결단력은 헤르난데즈가의 특성과도 같은 것, 자신과 같은 핏줄이란 생각이 드니 새삼 기분이 좋아져서 드러난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한 가닥의 흐트러짐도 없이 가지런히 머리칼을 정리해준 손은 푹 덮은 이불 밑으로 들어가서 열이 올라 따뜻한 손가락에 닿았다. 눈으로 보지 않아도 선명하게 그려지는 예쁜 손. 가늘고 곧게 뻗은 손가락과 길쭉한 손톱은 연분홍빛으로, 깨끗하게 다듬어져 어지간한 여자 손 모델보다 훨씬 예쁜 모양을 하고 있다. 그러나 보이는 것과는 다른 감촉. 한없이 부드러울 것만 같은 단테의 손은 눈에 두드러지지 않는 단단한 굳은살이 잔뜩 박혀있다. 남들보다 오랜 시간 붙잡고 있는 펜에 의해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거치는 고된 단련에 의해서.
보여주는 것만을 보는 사람들은 단테의 이 녹아버릴 듯이 부드러운 외형만을 보고 툭 치면 무너질 것 같다는 이미지를 떠올리곤 하지. 그러나 의외로 단테가 맡아 연기하는 역들은 굉장한 체력을 요구하는 것들이 많다. 이번에 카테라에서도 마찬가지로, 많이 달리고 많이 움직이는 활발한 동물인간의 역할을 맡고 있으니까. 이레와 단테의 갭이 상당히 커서 잘 인식하지 못하지만 그 이레를 연기하는 것이 이 단테다. 선천적으로 근육이 많이 두드러지지 않는 부드럽고 가느다란 체형이라서 그렇지 무술사범들이 혀를 내두르게 만드는 몸이다.
다행이지 뭐야. 운동 좀 한다고 근육이 우락부락하게 붙어버리는 다른 남자아이들을 생각해보면, 우리 천사는 얼마나 예쁜가 말이다. 겉보기에는 한없이 부드럽고 연약하게 보이지만 사실은 보디가드 두셋과 겨뤄도 지지 않을 만큼 강하다니, 그 의외성이야말로 우리 천사의 매력 포인트 아니겠어?
저절로 나오는 웃음에 실룩거리는 입가를 굳이 진정시키진 않았다. 대신 힘없이 축 늘어진 가는 팔목과 손을 어루만졌다.
애쉬 밀러, 그 아이가 단테를 꺼려하는 이유는 굳이 그 입으로 듣지 않아도 충분히 유추가 가능했다. 으리으리한 부잣집 막내아들, 천사 같은 외모에 말도 하지 않고 얌전하니 어린애 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보디가드며 전담 수행원이 24시간 따라다니는데다 가족들의 과해보이는 사랑과 보호까지.
이건 비단 밀러 그 아이에게서만 아니라 흔히들 상류층이라 부르는 이쪽 세계에서도 썩 좋은 눈초리를 받지 못하는 형태다. 그나마 단테가 진짜 나이차이가 많이 나는 막내이고 원래도 가족적이던 헤르난데즈가의 가풍, 보기 좋은 외형과 철저한 자기관리로서 단 한 점의 스캔들도 터지지 않았던 오랜 연예계 생활 등 남들이 보기에 책잡힐 만한 일은 건수조차 만들어내지 않았기 때문에 조용한 것일 뿐. 그저 아무리 애가 예뻐도 그렇지…… 정도에서 끝낼 수 있는 것은 칼 같은 관리가 없었더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나마도 투덜거리는 것은 연예계 관련 종사자들이나 매스컴에 많이 오르내리는 이들 밖에 없다.
헤르난데즈와 ‘진짜’ 교류를 가지는 큰손들은 헤르난데즈가 왜 이렇게 단테를 감싸고도는지 이유를 아는 이들이니까, 대외적으로 이 아이가 유리온실 속의 화초처럼 비춰지고 가문이 팔불출에 못 말리는 막내콤이란 소리를 들어도 전혀 이미지에 타격을 주지 않는다.
똑…… 똑……
자그마한 물방울이 규칙적으로 떨어져 내리는 소리가 들린다. 문득 고개를 들어 중요한 영양분을 단테에게 공급하는 약 팩을 올려다보다가, 그 떨어지는 물방울이 흐르는 길을 따라 이불아래 감춰진 다른 손까지 시선이 닿았다. 벌써 삼일 째다. 아이가 이렇게 의식 없이 누워만 지낸 것이.
태어나기를 약하게 태어난 것은 아니었다. 어머니는 꽤나 노산이었지만 건강히 단테를 태내에서 길러냈고, 또 무사히 자연분만으로 이 천사를 세상 밖으로 끌어냈다. 몸무게도 평균이었고 태내에서 크게 문제가 생길 일 또한 일어나지 않았으며, 유전적인 병이나 다른 문제들 또한 전혀 없었다. 걱정했던 것이 무색할 만큼 건강하게 태어났던 것이 단테였다. 짧은 기간이지만 어머니의 모유를 먹고 자랐고, 잔병치례 한 번 한 적 없이 위험한 시기를 무사히 넘겼다.
작고 꼬물꼬물한 단테는 까다롭지도 않아서 누구의 품에나 잘 안기고 누구에게나 잘 웃어주는 사랑스러운 아기였다. 정말로 하늘에서 내려온 아기천사 같았지. 물론 지금도 천사지만 말이야. 한창 사춘기였던 막내 다니엘이 방황을 끝내고 스스로를 다지게 만들었을 정도로 단테는 사랑스러웠다.
아장아장 걸을 무렵에는 형들과 누나들, 부모님과 조부모님들을 졸졸 따라다니며 아직은 제대로 나오지 않는 발음으로 뭔가를 옹알거리곤 했었다. 하얀색 레이스가 달린 아기옷을 입고 혹여나 다칠까봐 온 방에 깔아둔 푹신한 러그 위를 작고 통통한 발로 아장아장 걸어 다녔다. 지켜보던 사람들과 눈이 마주치면 방긋 웃고, 서툰 걸음걸이에 가끔 넘어져도 깜짝 놀라 달려오는 식구들이 무색하게 혼자 데굴데굴 울지도 않고 오히려 재밌다는 듯이 꺄르륵 웃곤 했지.
처음 몇 번의 납치 시도를 겪고 나서는 겁이 많아졌었지만 그것도 이내 극복해냈을 만큼 어린아이답지 않게 정신력도 강했다.
그러나 그날 이후 모든 것들이 틀어져버렸다.
너를 쇼에 내보내는 게 아니었는데. 속으로 중얼거리며 허리를 숙여 단테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어린 나이에 자신의 브랜드를 런칭하여 승승장구하던 디자이너이자 사업가.
소중한 것일수록 자랑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그때 알게 되었다.
단테가 너무 예뻐서 아기 옷을 디자인하던 것을 시작으로 점차 연령대의 폭을 늘려나가고 있었다. 지금은 의류 외에도 다양한 것들에 손을 대고 있지만 당시에 밀고 있던 주력은 아기와 엄마, 그리고 가족. 가족을 주제로 했던 패션쇼를 기획하면서 자신의 가족들을 자랑스럽게 내보이고 싶었다. 여러 가지로 바쁜 둘째 윌리엄과 오래전부터 잡힌 약속이 있던 조부를 제외하고 부모님과 막냇동생 둘, 외조부모님과 할머니가 등장해서 패션쇼의 피날레를 장식했다.
다니엘의 품에 안긴 단테는 그날따라 더욱 더 천사같이 예쁘고 사랑스러웠다.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곳은 처음이면서 겁먹지도 않았고 반짝반짝거리는 눈으로 자연스럽게 주변을 둘러보는 모습에서는 여유마저 느껴졌었다. 오히려 긴장한 것은 다니엘로, 단테를 안아든 팔로 아이의 옷자락을 꽉 움켜쥐고 있어서 웃음을 터트리게 만들었지.
무사히 쇼가 끝나고 남은 것은 뒷정리와 파티. 자신은 그때 사람들을 상대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다니엘은 단테와 함께 일찍 집에 들어가고 싶어 했지만 아이가 그것을 거부했다. 소란스럽고 화려한 파티장이 매우 마음에 든 모양으로 할아버지 할머니들이랑 있다가 집에 들어가겠다며 다니엘을 쫓아냈다고 한다. 부모님은 일이 있어서 먼저 들어가셨고, 오랜만에 젊은이들 노는데 끼어서 즐겁다며 조부모님들만 남아계셨었는데…….
단테를 끌어안고 있던 외할아버지가 배고파하는 아이에게 음식을 덜어주기 위해 아이를 잠깐 내려놓았고, 그리고 ……단테가 사라졌다.
정말로 잠깐일 뿐이었다. 시간으로 따지면 할아버지가 아이를 내려놓고 고개를 돌려 접시를 들어 올린 다음, 아가 뭐가 먹고 싶으냐- 하고 물어보는 그 찰나의 순간. 단테는 고작 다섯 살이었지만 매우 영리했고, 가족을 걱정시키는 장난은 치지 않는 어른스러운 아이였다. 그런 단테가 사라졌다. 당장 비상이 걸려서 파티장을 봉쇄하고 경찰을 부르고 사람을 풀어 주변을 뒤졌지만 아이는 마치 그 자리에서 증발해버린 것처럼 사라져버렸다.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어. 단테를 부르며 울부짖는 할머니와 할아버지, 사방을 뒤지는 보디가드들, 같이 주변을 뒤지던 모델들과 파티 참가자들에 곧이어 울려 퍼지던 사이렌소리.
그 뒤에 일어난 일들은 마치 지옥과도 마찬가지였다. 울부짖으며 자책하시는 외할아버지와 위로하시는 할머니들, 실신해서 실려나간 어머니와 급하게 귀국하셨던 할아버지, 단테와 함께 남아있을 것을 그랬다며 실성한 사람처럼 중얼거리던 다니엘.
그나마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이 윌리엄이었다. 헤르난데즈의 후계자답게 처신을 잘 했었어. 침착하게 경찰들과 납치사건 전담 수사국의 지시를 따르고, 가족들을 추스르고, 그들이 추진하고 있던 행사들이 주체들의 부재에도 타격을 받지 않도록 잘 조율했다.
대단한 가문의 귀한 막내가 납치당했기 때문에 수사에 착수하는 것도 순식간, 그러나 납치된 아동의 생존율이 제로가 된다는 24시간이 훌쩍 지나도록 납치범에게서는 그 어떠한 연락도 오지 않았다.
아무것도.
지옥 같은 시간이었다. 세상이 모두 무너져 내렸다. 하루, 하루 시간이 흘러갈수록 엉망진창이 되어갔다. 더 이상 괴로울 것은 없을 것처럼 힘든데, 다음날이 되면 또 어제보다 더욱 괴로웠다.
우리의 천사, 하늘이 내려준 선물, 사랑스럽게 그지없는 보물. 방긋 방긋 웃던 아이의 웃음이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우리들을 부르며 울고 있는 모습만이 떠오르고, 피투성이가 되어 움직이지 않는 아이의 꿈을 꾸고 비명을 지르며 깨어난다.
일주일이 흐르고, 열흘이 지나고, 보름이 되었을 무렵에는 더 이상 단테가 살아있으리라는 것은 기대도 할 수 없었다. 몸값을 노린 단순 범죄였더라면 납치 하자마자 연락이 왔어야 한다. 늦어도 이삼일 이내에는 연락이 와야 했다. 아이가 예뻐 팔기 위해 납치한 것이더라도 그 과정이 드러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감시의 눈들이 번뜩이고 있었다.
남은 것은 단순 변태 성욕자, 혹은 살인마가 본인의 쾌락을 위해 납치했다는 가설밖에 남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범죄자가 수많은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파티장에 들어와서 단테를 노려 납치해간다는 것도 이상했다. 몸값을 노려 표적을 정하고 납치했다는 것이 가장 타당한데 아무런 연락도 없으니 속은 타들어가고 아이가 살아있을 확률은 한없이 제로에 수렴했다.
……그리고 그 와중에 외할아버지가 결국 쓰러지셨다. 단테가 납치된 것이 전부 본인의 잘못이라 식음을 전폐하고 아이를 찾아 헤매시다가 마음의 병이 깊어져서 버티질 못하셨다.
외할아버지의 병세가 깊어지고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갔다. 헤르난데즈의 대저택은 생기를 잃고 버석하게 말라갔다. 더 이상은 혹시나, 혹여나 하는 희망조차 가질 수 없었다. 그저 무사히 그 영혼이 떠난 몸이라도, 찾을 수 있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납치범에게서 연락이 온 것은 한 달 하고도 이틀이 지나던 날 새벽이었다.
낡은 신문지에 둘둘 싼 작은 소포 하나가 저택의 정문 앞에 떨어져있었다. 아이를 찾고 싶으면 오백만 달러를 지정된 스위스의 계좌에 입금하라는 내용과 함께, 아이가 살아있음을 증명해주는 비디오테이프가 들어있었다.
“……….”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작은 테이프를 재생장치에 밀어 넣던 순간. 그때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아직까지 온 몸이 싸늘하게 식는다. 손안에 잡고 있던 단테의 손을 좀 더 꼭 깍지 껴 쥐었다.
-자, 인사해야지?
조금 치지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테이프는 다짜고짜, 납치범으로 추정되는 이의 목소리로 시작 되었다. 어둡고 흐린 공간. 아마도 공사 중 버려진 건물 같은 곳으로 시멘트와 철근이 그대로 보이는 곳이었다. 화면이 비추고 있는 곳은 빛과 그림자가 절반씩 드리워져서 그 아래에 무언가가 있다는 것만을 알 수 있었을 뿐, 자세히 알아보기가 힘들었다. 일부러 그런 식으로 찍은 거였겠지.
-어서 일어나렴.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어.
움찔.
그림자 속의 덩어리가 가족이란 말에 움찔거렸다. 보고 있던 가족들의 심장도 덩달아 덜컹거렸다. 화면 속, 그림자에 가려진 조그마한 덩어리가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털이 달린 무언가를 덮고 있었던 모양으로, 그 아래에 그들이 익히 알고 있는, 다시 볼 것을 바라 마지않았던 백금발이 빛에 닿아 조금씩 드러났다.
아이가 살아있다는 것에서 기쁨의 눈물을 흘리던 가족들은 그러나
이윽고 빛 아래 모두 드러난 단테의 모습을 보고 숨 쉬는 것을 잊었다.
-아주 예뻐…… 그래. 천천히 이쪽으로 돌아보렴.
모포처럼 덮고 있다고 생각했던 무언가가 사실은 아이의 등에, 어깨에 붙어있다는 것. 피가 흐르고, 검은 실로 보란 듯이 꿰매어져 있었다. 검고, 붉고, 상처투성이인 그 작은 등에 달린 것은
……날개였다. 하얀 새의 날개.
-이쪽을 봐. 엄마 아빠한테 인사해야지? 자, 여기 보고- 안녕- 해야지.
주춤 주춤 앞으로 돌아서는 단테를 보면서 비명을 지르지 않기 위해 입을 틀어막고 숨을 삼켰다. 자그마한 단테의 몸에 힘겹게만 보이는 커다란 새의 날개가 하나, 둘, 셋, 네 개. 심하게 마르지는 않았지만 창백한 얼굴, 몸 상태가 많이 좋지 않아 보이는 안색. 생기라곤 한 점도 느껴지지 않는 마른 눈을 한 작은 아이가 웃으라 말하는 화면 속 목소리에 기계처럼 입 꼬리를 올려 방긋 웃는다.
-이제 집에 가는 거야. 좋지?
끄덕끄덕. 끄덕거리는 고갯짓이 힘겨웠다.
우리들의 작은 천사는 진짜인양 날개를 달고 살아있지 않은 것 같은 모습으로 웃으며 우리에게 안녕을 고했다.
할머니들은 이미 혼절하셔서 수행원들과 주치의에 의해 다른 방으로 옮겨졌다. 할아버지도 가슴을 부여잡고 안정제를 투여 받고 계셨고, 무섭게 굳은 얼굴을 한 아버지는 숨이 넘어갈 것처럼 소리죽여 오열하고 있는 어머니를 부서져라 품에 안고 계셨다. 혼이 나간 듯한 얼굴을 한 다니엘은 멍하니 검게 변한 화면만을 주시했고 윌리엄은 겹친 손 위에 이마를 댄 채 고개를 푹 숙였었다.
나는…… 나는 어쩌고 있었더라. 아가, 나의 천사, 사랑스러운 우리 막내. 너의 그 처참한 모습을 보고 나는 숨도 쉴 수가 없었다. 차라리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때보다 네가 그렇게 살아있는 모습을 봤을 때가 더욱 고통스러웠어. 얼마나 아팠니. 얼마나 무서웠니. 얼마나 우릴 찾았을까. 사랑하는 네가 그런 짓을 당하는 동안 우리는 얼마나 편하게, 그저 네가 살아있기만을 바라며…….
이를 악 물고 입 안의 살을 짓씹어도 가슴을 울리는 통증은 가시지 않았다. 그저 약하게 숨을 내쉬는 단테의 어깨에 기대 그 숨소리를 듣고, 심장이 뛰고 있음을 확인하고, 네 등에 추악한 그것이 붙어있지 않음을 더듬으며 그날의 고통이 가라앉기만을 기다린다. 그날로부터 벌써 십수년이 흘렀지만 이 고통은 사라지지 않는다. 형벌이라고 생각한다. 사랑한다 말해놓고 지키지 못했던 그 죄에 대한. 네가 태어난 곳이 헤르난데즈여서 다행이야. 네게 부족한 것들을 억지로 채워 넣지 않아도 뒤를 든든하게 받쳐줄 수 있는 그런 집이라서 다행이다.
별달리 특색 지을 만한 내용-주변-은 나오지 않았지만 다행히 아이의 소재는 순식간에 파악되었다. 특수기동대가 투입되고, 비디오테이프를 전달받은 지 반나절 만에 단테는 비디오 속의 그 모습 그대로 가족들 품에 돌아올 수 있었다. 범인은 사살되었다고 했다.
만신창이가 되어있는 아이는 곧장 전속 의료진이 포진하고 있는 병원으로 옮겨졌다. 급히 행해진 검사들을 통해 날개가 아이의 몸에 박혀있기는 하지만 별달리 해악한 질병에 감염되어있지는 않았고, 간단한 수술로 쉽게 제거할 수 있도록 되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만 담당의는 어떤 세균이 감염되어 잠복하고 있을지, 그리고 어떤 약물 등을 사용했을지는 아직 알 수 없기 때문에 그 결과가 어찌될지는 모른다는- 절망 반 희망 반절의 답변을 해왔다. 그래도 살아있으니 되었다고 생각했다. 죽은 줄 알았던 아이가 살아 돌아온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다치고 병든 것은 천천히 고쳐나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아이가 다시 기운을 차리면 예전처럼 아름답게 웃어 주리라는 기대를 품을 수 있었다.
의료진은 시간을 지체할 것 없이 어떤 문제를 일으킬지 알 수 없는 날개부터 제거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그 와중에, 같은 병원에 입원 중이던 외할아버지가 단테의 귀환 소식을 듣고 힘겹게 몸을 일으켜 수술에 들어가기 전의 아이와 마주쳤다. 텅 비어 죽어버린 눈동자, 미동도 없이 축 늘어진 몸, 그리고 ……그 등에 매달린 네 개의 날개.
할아버지의 건강이 좋지 않았을 때라 이런 모습은 보여주지 않으려 했지만 부지불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아이의 처참한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은 외할아버지는 심장발작을 일으키셨고, 그리고 단테가 수술실에서 나오기도 전에 결국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나시고야 말았다.
정말 정신을 차릴 수 없이, 허리케인처럼 휘몰아치는 큰일들의 연속이었어. 너를 찾았지만 너는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상태로 그런 모습이 되어있었고, 외할아버지는 그렇게 돌아가시고.
그것은 떼어내 버렸지만 한 달의 후유증은 일 년이 넘도록 갔다.
상처가 낫지 않아 언제나 열이 오르고, 나아간다 싶으면 다시 곪아서 피고름이 흘러내렸다. 웃음이 끊이지 않던 사랑스러운 네가 표정 없는 얼굴로 고통스럽게 울부짖을 때마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어.
아가, 사랑하는 나의 천사. 네가 잡혀있던 그곳에서 수많은 시체를 발견했다. 네가 납치된 것보다 몇 년도 전에 사망한 시체부터, 네가 납치당한 이후에 사망한 십 수 명의 아이들까지. 대체 네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네가 말하지 않는 그곳에서의 시간, 그 안에서 너는 무엇을 겪었기에 이렇게나 부서져버린 걸까.
하늘에서 갓 내려온 아기 천사처럼 언제나 행복하게 웃고 있던 네게서 웃음이 사라지고, 말이 사라지고, 한 순간이라도 눈을 떼면 위험한 짓을 한다. 걸음조차 제대로 걷지 못해 비틀거리다 넘어지곤 해서 저택 전체에 푹신한 바닥을 다시 깔아야 했고, 가끔은 창문을 열고 뛰어내리려고 해서 창문마다 철창을 설치해야했다. 자꾸만 등 뒤로 손을 돌려 등을 긁어댔다. 상처가 다 낫지 않았을 때에도 그런 행동을 해서 천을 덧댄 수갑으로 움직임을 제한해야 했을 때도 있었다.
단 한 순간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저택 내부 아이의 동선을 따라 감시카메라가 설치되고, 아이의 주변에는 수행원들을 사교대로 두명씩 여덟명을 붙였다. 자꾸만 정신을 놓으려고 하는 아이를 붙잡기 위해 가족들이 매일 아침 점심 저녁 시간이 날 때마다 들러 끌어안고 쓰다듬고 사랑한다 사랑한다 속삭여주어야 했다.
자해의 횟수가 줄어들고 가족들과 다시 눈을 맞추기까지 2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정신과에서 다양한 종류의 치유를 목적으로 한 상담을 받고 놀이를 하면서 단테가 어느 정도 정상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길을 발견해냈다. 그게 ‘연기’였다. 단테는 자신이 스스로가 아닐 때에야 비로소 안정을 되찾았다.
가문에서는 아이를 위해서 단테에게 지워졌던 기존의 삶을 모두 벗겨내었다. 사랑스러운 우리들의 천사가 조금 더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랐고, 그것을 위해서라면 가문의 전통과 위신 따위는 얼마든지 내팽개칠 수 있었다.
연기자의 삶을 살면서 너는 조금씩 조금씩 안정되어갔지. 네가 아닌 다른 사람을 연기하면서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을 배워갔어. 연기를 하지 않을 때의 너는 여전히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지만 그래도 나는 네 두 눈에 반짝임이 돌아온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열 살이 넘을 무렵부터 거의 온전히 정신을 차릴 수 있게 된 너는 우리가 바라는 대로 네 한 몸 지킬 수 있도록 노력을 아끼지 않았지. 연기를 하지 않을 때 맑은 정신으로 버티는 시간은 길지 않았지만 그 짧은 시간동안 발휘하는 집중력은 무서울 정도였다.
가정교사를 통해 공부한 것들만을 가지고 원래 가기로 결정되어있던 대학에 진학했을 때 할아버지가 그 입학증을 들고 엉엉 울어버리시는 바람에 큰 소란도 일어났었지. 네가 처음으로 케빈과의 대련에서 그를 이겼을 때 네 수행원들이 모두 울음을 터트리던 것도 꽤 즐거운 일이었다.
네가 한 가지 한 가지, 남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무언가를 이루어낼 때마다 감동받는다. 네가 혼자 살아갈 수 있게 될 때까지는 아직도 많은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우리는 네가 스스로 설 때까지 충분히 기다려줄 수 있으니까. 지금까지처럼만 살아내 주면 좋겠어.
꼭 쥐고 있던 아이의 손에 조금 힘이 들어온다. 움찔거리는 것을 느끼고 퍼뜩 고개를 드니 열기가 다 가시지 않은 몽롱한 눈으로 내 천사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잘 잤니?”
“…….”
“이번에는 조금 오래 잤어. 그런데 깨어나는 시간은 너무 일찍 인걸.”
내 말에 단테가 입 꼬리를 살짝 올리며 미소 지었다. 삼일이나 잠들어 있었어. 숲속의 잠자는 왕자도 아니고. 투정이 섞인 농담에 속눈썹이 풍성한 눈까지 휘며 사르르 웃는다. 자다 깨어난 아이가 이렇게 웃게 된 것도 몇 년 되지 않은 최근의 일이었다.
그렇게 자고도 또 잠이 오는 건지 느리게 눈꺼풀을 깜박깜박 하는 단테를 폭 끌어안고 아이가 느리게 자신의 등을 토닥거리는 것을 느끼면서 조용조용 귓가에 속삭여주었다. 내일 일어나면, 깜짝 놀랄 선물이 옆방에 있을 거야. 선물이라는 말에 조금 고개를 갸웃하지만 이내 끄덕끄덕하면서 천천히 잠들어간다.
내 천사야, 나는 네가 그에게서 무엇을 보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네가 본 그것이 네게 도움이 될 수만 있다면 그가 어떤 사람이건 충분히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 다른 가족들 모두 마찬가지일거야. 다만 당장은 네가 아팠고, 또 그의 성정 또한 쉽지 않으니 부딪치는 거지만 사실은 그가 어떤 사람이든 관계없다고 생각하고 있을 거야.
또래의 친구로서도 좋고, 많이 다른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을 통한 경험의 축적도 나쁘지 않다. 말랑말랑한 가슴을 가진 예쁜 아가씨는 아니지만 혹시나 네가 그를 연애의 감정으로 보고 있더라도 괜찮아. 네가 원한다면 그를 감금해서라도 네 곁에 붙여놓을 테지만 너는 그런 것을 원하지 않을 테니까, 그저 근처에 머무르는 정도 까지만 하고 더 이상 손대지 않으마.
그와의 사이에서 어떤 관계가 진척될는지, 무엇을 풀어가야 할지는 알 수 없지만 모든 것은 네게 맡길게. 사랑스러운 나의 천사, 우리의 보물.
천사라는 네 애칭을 스스로 극복해냈던 것처럼 복잡하게 꼬인 것 같은 그와의 관계도 어떻게든 네 스스로 풀어내리라고 나는 믿고 있다. 그 과정에서 상처를 받고 네가 울어도 화풀이는 할지언정 손을 대지는 않을 거야.
“……할아버지와 댄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일단 아버지와 윌은 동의 했다. 당분간 우리는 조금 바빠서 한동안 집에는 잘 안 들어올 거야. 아이들도 본가에는 오지 못하도록 손을 써둘 테니까…….”
어느새 새근새근 잠들어버린 천사의 보드라운 뺨에 가볍게 키스하고 몸을 일으켰다. 약이 떨어지는 속도를 조금 더 느리게 조절해놓고, 이불을 잘 덮어주고 방을 나선다. 완전히 나서기 전 다시 한 번 잠든 단테의 모습을 눈에 담고 천천히 문을 닫았다.
단테의 방문을 떠나 애쉬 밀러가 잠들어있을 그 방 앞을 지나오면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그 안에 있는 남자를 떠올린다. 스트레스에 약하긴 해도 체력적으로 매우 건강한 단테가 삼일이나 앓아눕게 만들다니,
조금 괘씸하지만-. 단테가 앓아누웠다는 것은 그만큼 그를 신경 쓰고 있다는 뜻이니까. 으르렁거리던 그의 금빛 눈동자가 떠오른다. 갈색이지만, 금빛이 도는 예쁜 눈.
흐응. 호랑이나 사자같이 커다랗고 느긋한 맹수 보다는 표범이나 재규어 같은 느낌의 맹수다. 천사 같은 단테 옆에 세워두면 그림은 썩 나쁘지 않겠어.
다음에 다시 만날 때에 그저 사납기만 하던 그 눈동자가 어떤 빛을 띠고 있을지 조금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