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로단테/카를류안 2014. 3. 29. 03:20

오늘은 트위터에서 치도님과 풀고 놀았던 이레삼촌조카노바 썰.



 

 

 

 

 

 

*** 

 

 

노 바가 자신의 능력을 대가로 그를 섬 밖으로 내보내고 난 이후, 소중한 조카를 남겨두고 홀로 섬을 떠나오게 되었다는 것에 이레는 큰 충격을 받아 쓰러지고 만다. 정양을 해도 모자란 판에 심한 충격까지 받은 이레는 몇 번이나 수색대와 구조대를 보내지만 섬을 찾을 수 없다는 보고에 결국 모든 것을 포기해버렸다.  

 

병의 진행은 걷잡을 수 없이 빨라지고 그나마 의식을 차리고 케빈의 보고를 받던 것조차 할 수 없게 된 것은 섬을 떠나온지 한달도 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그저 누워서 몸의 고통에, 마음의 고통에 허덕이고, 피를 토한다.  

쓸 수 있는 약도 없는 병에 하루 하루 시들어가고, 보다 못한 케빈이 마약을 투여하기 시작하면서 통증에 몸부림치는 일은 줄어들었지만 약에 취해 정신을 차리는 일은 더욱 드물어졌다. 며칠씩 아무것도 비추지 않는 눈을 멍하니 뜨고 노바와 헤어지던 때의 환영을 보는듯 헛소리를 하거나 허공을 향해 헛손질을 했다. 가끔은 조금의 미동도 없이 늘어져 숨을 쉬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의식이 없는 상태로 피를 토할때면 그 핏물에 숨통이 막히곤 했기 때문에 시중인들을 몇 교대로 돌려가며 이레의 곁을 지켜야 했다.  

그나마 사람 형상을 하고 있던 마른 몸은 점점 더 앙상하게 말라 뼈와 가죽만이 남았다. 허공에 헛손질을 할 수도 없을 정도로 앙상해진 몸으로 그는 그저 가끔, 마치 숨을 내쉬듯 조카의 이름을 중얼거렸을 뿐이었다.  

 

조 만간 노바에게 사업을 물려줄 예정이었기 때문에 일의 전체적인 운영체제는 모두 다듬고 정리되어 케빈 혼자서도 충분히 꾸려갈 수 있었지만 주인의 부재는 큰일이었다. 노바 외의 다른 인물에게 유산을 물려준다는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았기에 이대로 노바를 찾지 못한다면 이레의 사후 일년 안에 그의 작위는 반납되고 재산은 왕실로 흡수되도록 되어있었다.  

 

다만 살롱 하나만은 그런 일이 일어날 경우 케빈의 앞으로 가도록 꾸며져 있었는데, 혹시나 일년이 지나고 난 다음 노바를 찾게된다면 그것만이라도 조카에게 상속하기 위한 조치였다. 케빈은 온전히 이레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의 재산에 눈독을 들일 일이 없어 그런 결정을 내려둘 수 있었다.  

또한 이레 자신이 죽고, 노바라는 고삐라도 없으면 그대로 주인의 뒤를 따라 죽어버릴지도 모를 충신에 대한 배려이기도 했다. 주인인 이레가 맡겨둔 살롱을 두고 함부로 목숨을 버릴 수 없고, 노바가 돌아온다면 노바를 두고 또 죽을 수 없기 때문에라도 그의 충신은 살아갈 테니까.  

 

 

 

그리고 시간은 흐른다. 이제 정말로 이레에게는 남은 시간이 얼마 없었다. 그의 삶을 지탱하던 모든 것이었던 조카, 노바의 실종 이후 이레는 지닌 병보다 깊은 절망에 더욱 고통스러워했다. 하루 하루 시간이 지날수록, 아주 가끔 정신이 돌아올 때마다 그의 절망은 깊어지기만 했다.  

그와 함께 있을 때도 불안해하던 어린 조카가 그 섬에 홀로 남겨져 어떻게 버티고 있을지, 혹여 위험한 맹수가 그를 위협하진 않았을지, 그때 보았던 섬의 주인이라는 그 남자가 자신의 아이에게 어떻게 대할지, 그리고 ㅡ살아는 있을지. 내가 볼 수 없지만 그래도 살아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찾을 길이 없는 그 섬,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린 그 섬의 부재에.. 더 견딜 수가 없었다. 당장 죽어서 혼만이라도 자유로워져 노바를 찾으러 가고 싶었다. 망가져가는 몸뚱이따위, 고통따위는 그저 그를 갈 수 없게 붙잡고 있는 무거운 족쇄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더 이상은 버틸 수 없다고 느꼈던 어느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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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노바는 그렇게 섬에서 남아 니콜라스의 저택에 들어가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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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 이 저택에서 지내다가 어찌저찌 얼마 안 가 섬밖에 보내지는 사람들과 함께 나오게 된다던가.... 여차저차 이차그차해서 삼촌네 저택에 도착, 삼촌은 건강하실까, 그렇게 갑자기 혼자 돌아가게 되서 놀라셨겠지 하고 걱정하며 들어서는데 집안 분위기가

스 산한 안개가 깔린 무덤가와같이 우중충하고 어두침침한게 불안감을 조성, 노바를 보고 깜작놀란 시중인들이 호들갑 떨면서 도련님 돌아오셨다고 난리피우고 위층에서 케빈이 시끄럽다고 나왔다가 깜작놀라면서 도련님!!! 을 외치고는 노바가 뭐라고 물을 틈도 없이

냅 다 잡아끌고 2층에 위치한 이레의 침실로 애를 끌고가는데.. 끌고가면서 불안한 노바가 케빈, 무슨 일이야, 삼촌한테 무슨 일 있어? 하고 물으니까 잠깐 말을 삼킨 케빈이 놀라지 마시고, 절대로 편안하게 해드려야하니까 감정 잘 다스리시라고 경고하고

방 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들어가는데 해가 잘 들지 않는 침대위에 이레가 누워서... 삼촌...? 하고 부르며 다가가지만 반응은 없고, 불안감에 떨며 한달음에 침대에 도착하니 보이는건 그사이에 가뜩이나 마른 몸이 완전 뼈만 남아서는 새파랗게 질려있는 안색

숨 을 쉬는 건지 안 쉬는 건지, 시트며 셔츠며 베개며 마르지 않은 핏자국에 축축하게 젖어있고.... 놀란 노바가 그자리에 굳어서 덜덜 떨고있는데 케빈이 조심스럽게 이레 입가를 닦아주면서 주인님, 도련님 오셨다고, 무사히 돌아오셨으니까 눈 좀 떠보시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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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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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해진 삼촌 안고 울먹울먹 사랑한다고 아직 모르는 게 많다고 가지 말아달라고 뭐 이렇게 속사포처럼 말 내뱉는데 힘없이 미소지으면서 고개 끄덕이면서 오른손등 위에 손 얹는다던가...이런 신파극같은 거 떠올리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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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m 좋아요........흐흡 ... 힘 없어서 토닥토닥... 손을 움직이는건지 그저 경련이 일어난 건지 알 수 없을 만큼 미약한 손길이지만 그래도 우리 노바, 울지마- 라고 말하는 것처럼 은 이 무슨 신파야 으어어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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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촌 뺨에 뽀뽀하고 울먹이다가 가시는 길에 맘 안좋게 우는 모습 보일 순 없어서 억지로 웃으면서 목덜미에 부비부비한다거나!그리고 삼촌 몸에서 힘이 빠지는 걸 느낍니다 전 신파극 취항이었나 봅니다 정체성을 깨달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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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원래 이런 장면 좋아해요 웰컴투 신파의 세계< 사랑한다고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온 듯한 착각이라던가 삼촌....? 하고 불러보지만 돌아오지 않는 대답, 그리고 차마 볼 수 없어 그저 끌어안고 눈물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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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까 말했던 꿈 속에서의 삼촌과의 시간ㅇ<-<...펑펑 울고 나서도 삼촌이 내가 걱정되서 들렀나봐, 하고 조금씩 맘을 다잡지 않을까요. 로단테님이 신파로의 문을 활짝 열어주시니 기쁘게 뛰어들어야겠구욬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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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얼쑤 그리고 열심히 일하고 배우고 하면서 지내는데 구석구석에서 보이는 삼촌의 손길이라던가 조카를 위해 준비해둔 여러가지 안배라던가 이런걸 보면 볼 때마다 울컥하다가 시간이 좀 더 지나고 나서는
내가 우리 삼촌한테 이런 사랑을 받았구나, 아직도 받고 있구나 하고 삼촌 생각에 눈물보다는 웃음을 지을 수 있는 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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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이 좀 진정되면 삼촌 지인들에게 삼촌은 어떤 사람이었냐고 물어보고 자서전 같은거 준비했을지도요. 여튼 결론은 해피엔딩!!!!!삼촌의 곁을 지킬 시간이 더 많았다면 더 행복했을지도 모르지만 이게 어디예요.
노바가 사업은 제 스타일로 하더라도 후계자한테만큼은 삼촌처럼 사랑과 관심을 마구마구 퍼주는 식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좀 욕쟁이 할머니같달까 츤데레st하겠다는 생각은 들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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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레의 츤데레 버전인가요ㅋㅋㅋㅋㅋㅋㅋ 어우.. 노바쨘...S2 삼촌이 위에서 지켜보면 엄청 흐뭇할 것 같네요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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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흥!!!별로 널 믿어서 사업 방법 알려주는 거 아니니까!...꼴에.../짜식 사후세곜ㅋㅋㅋㅋㅋ드럽게 오래 살아서 무지개 다리 건넌 노바가 이제 삼촌보다 나이 더 많아여 헤헤헤헿하고 나댔다가 딱밤맞는게 보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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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 스위티, 이젠 너무나 낯설어져버린 그리운 그 단어를 꿈에서도 잊혀지지 않는 목소리가 불러온다. 차마 뒤돌아볼 수가 없었다. 아니 아마 돌아봤더라도 볼 수는 없으리라, 흐려져버린 시야와 젖어가는 뺨 때문에.

누군가 다가와 앞에 서는 것이 느껴진다. 그리고 손- 이, 뻗어져 내 뺨에 닿고, 부드러운 손놀림으로 젖은 눈가를 닦아내는 것에 시야가, 트여서, 그래서, ㅡ그러나 그런 수고가 무색하게 다시 흐르는 것들에..조금,웃는다.

어서와. 저 왔어요. 행복했니? 즐거웠어요. 지켜보지 않아도, 괜찮아? 저를 믿어주셨던 만큼, 저도 믿고 있으니까요. 이젠.... ...삼촌이랑 같이 갈래요.

부드럽게 잡아오는 손길은 그리운 것이었다. 여전히 나를 작은 동물 다루듯 닿아오는 그 손에 히죽 벌어지는 입을 조절할 수가 없었다. 천천히 걷는 그의 걸음에 맞춰서 나란히 걸으며, 괜히 예전엔 해보지 못했던 농을 건넨다.

삼촌, 나 이제 삼촌보다 나이 더 많은거 알아요? 봐요, 키도 옛날엔 작았었는데, 지금은 삼촌이 조금 더 작은 것 같아. 그에 요놈, 하고 웃으며 머리를 헝클이는 삼촌은 내가 본 적 없던 건강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시답잖은 농담을 건네고, 삼촌이 웃고, 그렇게 아무것도 없는 흐린 길을 나란히 걸으며- 삼촌, 우리 이제 어디로 가는 거예요? 글쎄, 그저 그리운 이를 기다렸다 이 길의 끝으로 가면 된다고 느꼈을 뿐이야.

우 리, 계속 같이 있을 수 있는 거 맞죠? 드디어 만났는데... 또, 헤어지게 될까봐 목소리가 떨렸다. 살아온 세월이 무색하게 겁쟁이 어린애가 되어버린 것만 같다. 아니, 실제로 나는 작아져 있었다. 먼 옛날 신비한 섬에 떨어졌을 때의 아직은 소년이던 시절의 나로. 그런 내 손을 힘주어 잡으며 삼촌은 미소지었다. 적어도 이 길의 끝까지는 함께 하겠지. 다 큰줄 알았더니 아직 덜 컸구나. 웃으며 이마에 입맞춰주는 삼촌에 불안감이 가라앉았다.

불안하니? 불안해요. 사실은 나도 무섭단다, 그래도 이 길을 너와 함께 걷고 있으니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들어버렸어. 어느새 내 키는 그의 허리에 못 미치도록 작아져있었다.

작아진 나를 번쩍 들어올리는 것에 그 품에 머리를 묻었다. 목덜미에 뺨을 부비니 머리카락이 그를 간질인듯, 조금 움츠리며 웃는 소리가 들린다. 작아진 손으로 길어진 그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좀 더 품안에 깊숙히 기댔다.

기다려줘서, 고마워요. 마중나와주어서, 고마워요. 그래. 토닥토닥 등을 두드리는 부드러운 손길을 느낀다. 귓가를 간지럽히는 가벼운 허밍이 들린다. 그래, 이거면 돼. 이걸로- 충분해. 불안감이 사라졌다. -다음번에는,

나를 안아주는 이 품을 또 떠나올지라도 다음번에는, 내가, 먼저 찾아가면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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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바 후계자 시점에서-그는오랜 친구를 만난 것처럼 흐뭇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뭐 이런 글귀라도 말미에 넣어야 할 것 같네요 크흡...우리 그저 썰만 풀고 있었는데 왠지 인생이 느껴져요ㅠㅠㅠㅠㅠㅠ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그춐ㅋㅋㅋㅋㅋㅋㅋㅋㅋ  

ㄴ마치 그리운 이를 드디어 만났다는 듯, 그의 주름진 얼굴에 행복한 미소가 내려앉고 있었다. 그래서 느꼈다, 항상 그리워하던 누군가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posted by 로단테/카를류안 2014. 3. 29. 03:20



애쉬.’

 

귓가에 내려앉는 목소리가 간지럽다. 아주 부드럽지만,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아 묘하게 가라앉은 그 목소리가 가느다랗게 귓가를 긁어온다.

 

천천히 뒤에서 안아오는 가느다란 팔을 내칠까 잠시 고민하지만, 자신은 지금 그런 고민이 무색할 만큼 크게 지쳐있었다. 마음이, 지쳤다. 더 이상 어찌할 수가 없어. 완전히 벼랑 끝에 내몰려있다.

평소와 다르게 조금 차갑게 느껴지는 손이 느리게 옷 안쪽을 파고들어온다. 그것은 그의 체온이 낮은 까닭일까, 아니면 내가 뜨거운 까닭일까. 열이 오르는 건가? 지친 마음의 과부하가 몸에 영향을 끼치는 걸까, 아니면 닿아오는 체온의 주인이 긴장하여 푸르게 질린 걸까. 마치 소설에나 나올 법한 고민을 속으로 늘어놓다가 이내 그것도 놓아버렸다. 우습지, 이런 서술이 무에 도움이 된다고 나는 되도 않는 속을 늘어놓고 있을까.  

 

제제를 하지 않으니 어루만지는 손은 점점 더 대담해진다. 부드럽게 피부를 훑는 손길은 별다른 성적 의도를 품고 있지 않았지만 점점 이상한 기분이 들게 만든다. 그저 어린아이가 좋아하는 담요를 쓰다듬는 듯한 손길일 뿐인데, 어째서. -그런 손길에도 애써 흥분해버릴 만큼 나는 지금, 위로가 필요한 건가.

 

, ,  

 

어깨와 목덜미에 내려앉는 입술이 부드럽다. 굳이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엷은 꽃잎 색을 띄고 있으리란 것을 떠올릴 수 있을 만큼 촉촉하고 말캉말캉하다. 마치 개나 고양이가 애교를 부리듯 등 뒤에 고개를 묻고 천천히 부비는 것을 느끼며 멍하니- 이 접촉이 불러일으키는 감각을 느낀다. 한 번, 두 번 닿아올 때마다 내 온도에 물들어 미지근해지는 서늘한 피부가 썩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좀 더.’

 

……-?’

 

…….’

 

조금 당황한 듯 되묻는 목소리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내 배와 가슴만을 천천히 쓰다듬고 있던 가는 손가락을 잡아서 좀 더 아래로, 당겨 내렸을 뿐. 놀란 듯 굳어 움직이지 않던 손의 주인이 이내, 느리게 버클을 잡아당긴다. 한 손 만으로 섬세하게 버튼을 풀어내고 지퍼를 잡아 지익- 내리는 소리를 들으며 좀 더 뒤로 편안히 몸을 기댔다. 지금 이 순간 내 몸을 만지는 것이 그라서 다행이라고 문득 생각한다. 이렇게 성적인 접촉은 처음이지만 그와의 스킨십은 질척하게 끈적이는 것 없이 담백하기 그지없었으니까. 그가 원하는 것은 단지 닿아있는 것 뿐, 그 외에는 내 기분을 살펴 좀 더 붙어있던가, 아니면 바로 떨어지던가, 모든 것이 내게 맞춰져 있다.  

 

너는 단지 나라는 존재 하나만으로 충분한걸까.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거지, 어떻게? ? -지금의 나는 특히나 더 그런 그가 이해되지 않았다. 나를 이토록 괴롭게 몰아가는 이 감정도 사랑이라는데, 이렇게 질척하고 끈적거리는 덩어리를 품고도 어떻게 이렇게 가볍고 부드럽게 어루만질 수 있는 걸까. 내 양손은 온통 끈적이는 검은 덩어리 투성이라 차마 아무도 아닌 타인조차도 만질 엄두가 나지 않는데, 어떻게 너는.

 

…….’

 

서늘한 체온이 장골을 따라 아래로 흘러내리듯 부드럽게 내려가 감춰져있어 다른 곳보다 체온이 높은 곳에 닿았다. 그 서늘한 감각에 조금 놀라 목덜미를 움츠리니 미안하다는 듯 부드럽게 입술을 콕콕 내려찍는다. 가볍게 훑어 쥐고, 그 끝을 손끝으로 가볍게 비비고, 쉽게 부서지는 것을 만지듯 조심스럽고도 부드럽게 어루만진다. 굉장히 조심스럽고도 가벼운 접촉임에도 내 몸은 차근차근 착실하게 흥분의 단계를 밟아갔다. 조금이지만 호흡이 간지러워졌고, 귀 끝으로 피가 몰리는 것이 느껴진다. 슬쩍 벌리고 있던 다리가 자꾸 움찔대며 닫히려고 하자 배 위에서 머물고 있던 한 쪽 손이 허벅지 위로 올라와 그러지 말라는 듯, 조금 강하게 잡아 누른다. 한 손 뿐이었고 악력이 세다고는 해도 날 고려해서 정말로 아프게 그러쥔 것은 아니었지만 순순히 다리를 벌리고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게 힘을 줬다. 마치 바람결에 흔들리는 풀잎처럼 가볍고, 부드러운 손길일 뿐인데도 애써 고정하지 않으면 절로 몸이 움츠러든다.  

 

애쉬.’

 

…….’

 

귓가에 대고 나직하게 속삭이는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깜짝 놀라 신음을 내뱉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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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후우, 후욱, 지 진정하자, ……정은 무슨 단테!! , , , , 이게, 이게 뭐야!”

 

……?”

 

너 지금 이게 뭔지는 알고 읽고 있었던 거야?!”

 

…….”

 

이거, 누가 너한테 줬어. 설마 네가 뽑은 건 아닐 테고. 누구야.”

 

…….”

 

여기서 묵비권 행사하지 말고!! 누구야, 아니지 누구긴 누구겠어, 댄이지?! 그렇지?!”

 

…….”

 

아악! 진짜 그놈은 대체 이런 걸 어디서 뽑아오는 거야! , 내가 기가 막혀서, 아니 대체 왜 너랑 나를 엮어서 커플을 만들어 놓는 거냐고! 이 여자들이 진짜!”

 

……남자 팬도.”

 

, ?! 남자 팬이 너랑 나랑 엮어서 커플놀이하는 클럽에 가입해있다고?? , 이 인간들이 미쳤나……!”

 

…….”

 

얼굴이 울그락불그락 해져서 손에 쥔 종이를 찢어버릴 듯 구겨 쥐며 펄펄 뛰는 애쉬의 앞에서, 단테는 사실 그 소설 남자 팬이 쓴 거라고 했는데- 란 말을 속으로 삼켰다.  

 

애쉬와의 관계가 그럭저럭 친구라고 부를 수 있게 된지도 어느새 몇 년. 이제 슬슬 이런 것에도 익숙해질 때가 되지 않은 걸까? 자신들을 상대로 이런 소설을 써내려간다는 것이 재미있고, 신기하고, 또 나름 흥미진진하고…… 난 꽤 괜찮은 것 같은데. 그러나 이 생각도, 그는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멀뚱멀뚱, 뭔가 중얼대며 펄펄 뛰는 애쉬를 물끄러미 올려다보고만 있었다. 애쉬는 그들 사이를 Just friend, 그냥 친구사이일 뿐이라고 몇 번이나 못 박아 이야기 했지만 사실 단테로써는 그냥 친구 사이이든, 아니면 다른 특별한 사이이든 별로 상관이 없다- 사실 아무 생각도 없는 상태였다. 그는 그저 애쉬 밀러라는 사람이 자신의 곁에 머물러주는 것만으로도 다른 모든 부족한 부분들이 충족되는 것만 같은 충만감을 느끼고 있었기에 아무래도 좋았다. 그러나 애쉬는 다른 듯, 언제나 친구 이상의 감정이 가미된 무언가를 발견만 했다 하면- 저런 식으로 예민하게 굴곤 했다. 가볍게 우스갯소리로 사귀는 거 아니냐는, 연인이 아니냐는 말도 듣다보면 그게 진짜가 돼버리니까. 이리저리 휩쓸려 손 쓸 틈도 없이 자신과 강제로 엮여버리는 상황이 생길 것이, 싫은 거다, 그는.  

그리고 지금에 와서는 진짜로 그가 자신에게 연애감정을 느끼고 사랑에 빠진다 하더라도 인정하지 않으려 하겠지. 강제로 고정되는 것이 싫다고 말하면서 이미 단단히 굳어버린 이 관계는 눈치 채지 못하는 것이 조금…… 미묘하다. 그다지 연인으로 엮이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그저- 그렇게 된다면 자신과 좀 더 가까워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기대감 같은 것은 조금 있었으니까. 그래도 친구라는 관계는 고정되어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테니까, 그것으로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나저나 저것도 결국 찢어버리는 건가? 야한 부분도 조금 있지만 대체적으로 저 글은 굉장히 탄탄한 스토리를 가지고 자신과 애쉬 두 사람의 성격을 세밀하게 분석해서, 꽤나 잘 써내려간 훌륭한 작품이었다. 스스로 읽으면서도 아- 이럴 때 이런 상황에서 애쉬라면 그렇게 할 것 같은데- 라고 생각했던 부분들이 아주 기가 막히게 잘 맞아떨어졌었으니까. 저걸 출력해서 책처럼 엮어 가져다준 작은 형이 하는 말로는, 자신과 애쉬 커플을 추종하는 팬들 틈에서도 굉장히 좋은 평을 받고 있는, 손에 꼽히는 명작이라고 했었다. 그리고-

 

게다가 이건 말도 안 돼, 왜 내가 아래야? , 내가 너한테 ㄷ……… , ㅆ…… 후우, 후우, 아우…….”

 

씨근덕거리다가 머리카락을 마구 비비는 애쉬의 중얼거림처럼 저 소설은 대부분의 소설에서 내가 아래쪽인 것에 반해, 애쉬 쪽이 아래쪽인…… 흔치 않은 소설이라고 했지.

내 손에 소설을 꼭 쥐어주며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작은 형이 가르쳐 줬었다.

 

내 앞에서 정신 사납게 왔다 갔다 하던 애쉬가 결국 구겨진 책을 쥐고 방을 뛰쳐나간다. , 아직 덜 읽었는데…… 조금 아쉬워서 시무룩했지만 그래도 곧 기운을 차렸다. 아마 애쉬와 한바탕 실컷 놀고 나서 작은 형이 다시 한 부 뽑아다 줄테니까. 소설 속에서 자신은 어떤 식으로 애쉬를 만지고 흥분하게 만들까? 그리고 그 뒤에 둘의 관계는 어떤 식으로 변해갈까? 그 작가의 시선 속에서 우리들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얼른 다음 내용을 읽고 싶은데- 작은 형한테 찾아가볼까, 둘의 싸움이 심해지면 말리기도 할 겸.  

 

툭툭 앉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 걸음을 옮기는 단테의 얼굴에는 평소보다 더 즐거운 듯한 미소가 방긋 걸려 있었다.



 

 

 

 

 


posted by 로단테/카를류안 2014. 3. 29. 03:20

ISLAND -치도님 

 


 

 

 

문 명과 멀찍이 떨어진 섬에도 아침은 어김없이 찾아와 잠든 이들을 깨운다. 노바는 눈가를 찌르는 햇살에 끄응, 신음소리를 내며 눈살을 찌푸렸다. 아직 잠이 덜 깬 하늘은 창백하지만 빛이 곳곳에 찾아와 숲을 일으킨다. 노바는 눈을 느리게 끔벅이다 고개를 조금 들어 촉촉이 젖은 정경을 바라보았다. 너무 맑아 시린 기분이 드는 공기와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한 잎사귀들. 노바는 약만 제대로 챙길 수 있었다면 그나마 휴양 온 기분이 들었을 거라 생각하며, 다시 자리에 누워 병약한 자기 삼촌을 바라보았다.

 

자 기만치 큰 소년을 아기처럼 꼭 끌어안고 잠든 백작의 얼굴은 파리했다. 고요히 감긴 눈매는 번뜩이는 눈빛을 품고 있었지만 세월의 주름이 엷게 새겨져 성년이 안 된 조카와 대비되었다. 조카를 끌어안은 가는 몸은 안기는커녕 도리어 그 자신이 부러지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가늘었다. 노바는 문득 이렇게나 그에게 매달리는 자신에게 자괴감이 들었다. 지금은 자신이 환자를 챙겨야 할 상황이 아닌가. 얼음 침대에 누워있는 몸은 차갑지만 눈가는 뜨거워진다. 노바는 서리처럼 흰 한숨을 쉬고는 잠든 삼촌에게 머리를 기댔다.

 

어 릴 적부터 자신을 유난히 예뻐했다던 삼촌. 그러나 그 애정이 무색하도록 시간에 그를 희미하게 지우는 건 빨랐고 비어 있던 시간의 벽은 두꺼웠다. 노바는 행동에서 노련미가 뚝뚝 떨어지는 이레 백작과 자신을 한없이 귀여워해주던 삼촌을 갑자기 이어 붙이기가 힘들었다. 그저 서먹하게 인사를 나누었을 뿐이었고, 대답에도 숨기지 못한 어색함이 묻어났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비행선의 불시착. 그리고 쿠키 하나 사먹을 수 없는 야생에 떨어졌다. 이유 없이 일어난 오른팔의 불꽃은 덤이었다. 노바는 처음 능력을 얻었을 때를 떠올렸다. 갑자기 생긴 능력에 당황하던 자신의 불붙은 손을 쥐어주며 말해주었었다. 괜찮아, 뜨겁지 않아.

노 바는 희게 질린 그의 손마디를 매만졌다. 푸른 불길이 손가락을 태울 것처럼 일렁였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그의 능력으로 온도를 내린 탓이다. 마치 불에 괴로워하는 조카를 돌보려는 것처럼 백작은 온도를 조절하는 능력을 얻었고, 태어났을 때부터 해온 것처럼 능력을 자연스럽게 다루었다.

 

그 러나 그렇게 아끼는 것 치고는 누구나 남남이라 생각할 정도로 닮지 않았다. 얼음 위에서 금빛과 은빛으로 부서지는 머리칼과 차분한 눈매, 질투의 괴물처럼 선명한 녹색 눈동자는 어떤가. 무튼 빈말로라도 노바의 부숭부숭한 짧은 머리와 샐쭉하니 치켜 올라간 눈꼬리와 닮았다고 하기는 힘들다.

 

성 정 역시 그러하다. 뾰족하지만 서툴게 깎인 연필 끝을 연상시키는, 성질 급하고 예민하지만 아무에게나 정을 묻히는 어린 귀족 노바. 예의바르고 친절한 신사의 가죽을 둘렀지만 밤바다처럼 검고 차가운 성정의 이레 백작. 소년의 설익음과 중년의 원숙함이라고 단정 짓기엔 기질적으로 다르다.

 

그 러나 노바는 자기 삼촌을 친아버지보다 더 가깝게 느끼고 있었다. 비단 이 섬에 떨어져서 그밖에 의지할 곳이 없어선 아니었다. 친아버지가 자신을 별로 달갑게 여기지 않아서여도 아니었다. 백작이 몸을 뒤척이자 노바는 손을 떼고 다시금 눈을 감았다.

 

그 자신도 유모나 다른 오래된 하인들에게서 들은 얘기지만, 그의 아버지도 처음부터 노바를 멀리했던 건 아니었다. 그 역시 첫 자식이 예쁘고 귀여웠다. 자신을 이어받은 구석이 별로 없는 외모지만 잉크처럼 검은 머리칼도, 선명한 스펙트럼의 파란 눈도 우리 색시 같다며 안고 살던 게 노바의 아버지였다. 언제 자라서 자기 작위를 물려받을까, 언제 그때가 올까 노래처럼 말하고 다녔다.

 

하 지만 처남 이레 백작이 아이를 예뻐하던 게 불씨가 되었다. 원래 누이의 결혼을 달가워하지 않았던 터라 왕래가 없었던 그가 노바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이다. 때문에 처남이 껄끄러웠지만 그렇다고 처음부터 의심하지는 않았다. 물론 내 자식이니 예뻐 보이겠지, 멋지게 키워서 건방진 네 놈 코를 눌러주마. 이런 식으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갈수록 조카를 제 자식처럼 여기는 모양새가 영 아니꼽게 느껴졌다. 게다가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게 하려는 것처럼 아내만을 닮은 아들. 그의 아버지는 압박감을 느꼈고, 노바가 슬슬 말귀를 알아먹을 즈음에는 정말 내 아이가 맞냐고 아내와 싸운 적도 몇 번 있었다. 첩을 들일 생각까지 했었다.

 

의 미 없는 논쟁은 노바의 동생들이 태어나면서 일단락되었다. 남녀 쌍둥이였다. 한명은 아버지의 작위를 잇고, 한명은 가문의 관계를 돈독히 할 것이다. 어머니는 자비로운 신께서 우릴 돌보시는구나, 라며 둘을 끌어안았다. 노바는 자비로운 신께서 왜 아버지의 미움을 주셨는지 몰랐지만, 대신 삼촌을 주셨나보다 하고 혼자 납득했다. 그걸 아는지 이레 백작은 노바의 동생들에겐 꽤 엄격했다.

 

그 래도 노바는 동생들을 제법 예뻐했다. 작은 것들이 꼬물대는 걸 보고 있노라면 삼촌이 말했던 애틋하고 사랑스러워 눈물이 날 것 같은 감정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하나로도 예뻐 죽겠는데 둘이나 주다니! 역시 신은 착한 어른이었다. 아장아장 걸어와 안길 때는 애 닳겠다며 유모가 뺏어들 정도로 뽀뽀해 주었었다. 무엇보다 잠시나마 아버지의 자식이라는 소속감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반대로 아버지가 노바를 견제하기 시작했다. 동생들과 놀아주는 걸 발견하면 공부해야 된다며 떼어놓기 바빴고, 으레 나이가 몇인데 애들이랑 노냐는 잔소리가 따라왔다. 결국 그 아이들과도 점점 멀어졌다.

 

노 바는 자기 아버지와 눈이 마주치기가 싫었다. 그럴 때면 아버지는 왜 남의 집에 와 있냐는 눈초리로 쏘아보다가, 한때 제 아들이 아니라 의심한 데다 화풀이까지 했음이 미안해 조금 눈알을 굴리다가, 제 아들을 뺏어간 이레 백작이 있는 쪽을 바라보는지 눈빛이 먼지처럼 뿌옇게 가라앉았다. 노바가 어릴 적 기억이 희미한 건 언젠가 떠날 곳임을 알아서였을까. 그는 결국 아버지에게서 등을 돌리고 니게르의 후계자가 되기로 결정했다.

 

그 렇게 되니 더욱 집 안의 공기가 숨 막히게 불편했다. 그 안에서 버틸 수 있었던 건 어머니의 조용한 응원과 삼촌으로부터 받는 가르침이었다. 물론 그 가르침들이 결코 쉬운 건 아니었지만 으레 그렇듯 뒤에서 받쳐주는 손이 있었기에 버틸 수 있었다. 그에 비하면 아버지와의 불화 따위, 둘 다 성격이 어려워서 안 맞는 거겠거니 하면 그만이었다. 가르침을 받으면서 접한 이야기들은 호러소설보다 끔찍한 것들도 있었기에 자신 정도면 양반이다 싶었다. 항상 삼촌이 뒤에서, 또는 옆에서 자신을 이끌어 주었다. 관심을 가지고 응원해주었다. 정말 내가 이 모든 걸 받아도 되는 걸까, 의심하리만치 큰 사랑.

 

-그런 삼촌을 남처럼 여겼다.

 

노 바는 옷깃을 부여잡고 품속으로 더욱 깊이 파고들었다. 휴양지로 떠나기 전 어색해하며 손을 내미는 자신에게 눈을 부드러이 휘며 웃어주었다. 어렸을 적, 자신과 눈이 마주치면 늘 그랬던 것처럼. 비행선 내에서 대화를 나눌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 웃음이 그렇게 후원을 해줬는데도 자길 불편해하는 조카에게 섭섭해도 다가가기 위해서였을 거라 생각하면 부끄럽고 미안하기 그지없었다.

 

움직임을 느낀 백작은 느린 숨을 내쉬며 눈을 떴다. 숲을 닮은 녹색 눈이 가늘게 뜨이며 내려다보자, 노바도 그의 품에 얼굴을 묻은 채 그를 올려다봤다. 조카의 눈가에 물기가 촉촉한 걸 발견한 삼촌은 살풋 웃으며 눈물을 닦아주었다.

 

“또 나쁜 꿈 꿨니? 왜 울고 그래, 스위티.”

 

평소라면 내 나이를 좀 생각해보고 스위티라고 부르라고 성을 냈겠지만, 오히려 언제나처럼 자신을 불러주는 모습에 안심이 된다. 노바는 흐느낌 섞인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삼촌.”

“왜.”

“돌아가시면 안 돼요.”

 

괜한 소리를 한다는 듯 후후, 느리게 웃고는 머리를 쓰다듬는다. 이대로 다시 잠들 것처럼 상냥한 손이다.

 

“징그럽게 살 텐데?”

 

노바는 무어라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대신 그를 품 안으로 더욱 꼭 끌어안고 느리게 숨을 쉬다가 한 마디를 꺼냈다.

 

“스위티는 그만둬요.”

“싫은걸.”

“칫.”

 

이 내 다시 눈이 감기기 시작한다. 잠꾸러기, 작게 키득대는 목소리가 귀 안을 굴렀다. 아니라고 부정하는 건지, 나름 애교라고 부비적대는 건지 노바의 고개가 잠깐 좌우로 움직였다가 다시금 천천히 숨을 쉬기 시작한다. 그의 삼촌이 부드럽게 등을 토닥이자 스르르 잠의 바다에 빠져든다. 영원히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잠들지만 또다시 깨어날 것이다. 그러면 그땐 삼촌과 무엇을 할까. 수면 위로 머리를 내놓고 고민해 봤지만 다시 일어나도 삼촌이 옆에서 웃어주는 것 이상은 떠오르지 않았고, 이내 완전히 잠겼다.









 

 

 


posted by 로단테/카를류안 2014. 3. 29. 03:20



섬에 떨어진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라는 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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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로단테/카를류안 2014. 3. 29. 03:19

치도님




posted by 로단테/카를류안 2014. 3. 29. 03:19








별로 좋지 못한 꿈을 꾸었다. 기억하고 싶지 않지만 지울 수 없는 그때의 꿈이었다. 무섭고 괴롭지만 더 이상 울고 비명 지를 기력도 남아있지 않은 그런 꿈.

그저 담담히 눈앞에서 벌어지는 참상을 지켜보기만 했다. 내게 일어났던 일도, 그리고 그것을 위해 죽어가던 다른 아이들에게 닥쳤던 일도.

 

끔찍해.

 

잠에서 깨어나며 온 몸을 진저리친다. 등이 아파. 여러 차례의 수술과 성형으로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은 등이, 아프다. 바로 누울 수도 없어 헐떡거리며 엎드려 꿈틀거리는 사이 케빈과 유모가 달려와 나를 추스른다. 아파. 뻐끔뻐끔, 그러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등에 뭔가 있는 것 같아. 떼어내야 해. 뜯어내야한다. 케빈, , 손을 놔줘. 유모, 등이 아파. 뜯어줘, 없애줘.  

 

그러나 케빈은 날 놔주지 않고 유모는 그것을 떼 주지 않는다. ? 왜 안 떼 주는 거야? 내가 아무리 울어도 둘은 날 잡고 놔주지 않을 뿐 다른 것은 해주지 않았고, 그리고 아마 닥터 요한이 방에 들어왔던가. 그를 보고 안심했다. , 그가 이것을 뜯어내줄 테니까. 가만히, 얌전히 기다리면 없애줄 거야. 헐떡이며 그의 손을 좇았다. 주사바늘이 약물을 내게 연결된 튜브에 주입하고, 그리고 조금 시간이 지나니 편안해졌다. 자꾸 졸리다. 케빈이 꽉 끌어안고 있던 내 몸을 다시 천천히 침대위에 내려준다. 유모가 따뜻한 손으로 뺨을 쓸어주고 가슴을 토닥거려줘서 기분이 좀 더 나아졌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주변이 어두웠다. 부스스 몸을 일으키니 방 한쪽에서 케빈이 득달같이 달려와서 부축해준다. 아니, 유모였나? 유모……아냐, 이건 케빈이다. 유모의 손은 조금 더 부드러워.


 

괜찮아, 천사님?”

 

…….”

 

……기분은 좀 어때?”


 

케빈이 가져다준 물을 마시고 침대를 벗어났다. 다리가 조금 후들거리지만 걸을만하다-고 생각했다. 씻고 싶어. 땀에 젖은 몸이 불쾌하다. 머리가 멍해서 생각이 잘 이어지지 않았다. 팔에 뭔가 감기는 것이 있어 조금 흔들자 케빈이 내 팔을 붙잡고 그것을 떼어낸다.


 

씻어야겠네, 유모를 부를게. 욕실에 데려다 줄 테니까-.”

 

…….”

 

잠시만, ……, 그냥 걸을래? , 알겠어, .”


 

케빈의 손이 등에 닿자 기분이 확 나빠졌다

 

왜일까-, 그때의 꿈을 꾸었던가. 속이 울렁거려. 비틀비틀 걸어 방에 딸린 욕실에 들어갔다. 등에…… 있었던가? 있나? 뜯어냈던 것 같은데. , 없어 이젠. 그래, 없지…… .



 

 

 

유모의 도움을 받아 몸을 씻고 나오자 기분이 많이 나아졌다. 그러나 여전히 머릿속은 몽롱해서 그녀가 뭔가 말하는 걸 듣지 못했다. 자꾸 늘어져. 낯선 감각은 아니다.  

 

슬슬 한계가 올 때가 되기도 했지……. -뭐가무슨 한계……? 이상해, 뭔가 조금, 생각이, …….



 

깜박깜박 멍하게 눈만 깜박이고 있는데 불쑥, 눈앞에 뭔가가 들이밀어진다. 조금 놀랐다.  

 

왠지 목을 가누기가 힘들다. 어지럽고, 울렁거리고, 시야가 자꾸 점멸하듯 깜박여서 눈을 뜨고 있기가 힘들었다. 유모? 유모의 손? 내 손을 잡아서 알 수 없는 덩어리 위에 얹어주는 손. 그리고 느껴지는 것은 부드럽고 촉촉한 질감의 작은 것들.  


잠시 어지러운 머리를 붙잡고 간신히 떠올렸다. 나는 이 감촉을 알아, 이건 꽃이야. 꽃잎의 느낌이다. 차갑지만 싸늘하지 않고 부드러우면서 촉촉한. 뭘까…… 힘겹게 초점을 맞추어 들여다보니 푸른색이 아름답게 번진 수국이었다.


 

천사님, 듣고 있어? 이거 애쉬 밀러가 천사님 준다고 들고 온 거야.”


애쉬……?

 

……?”

 

애쉬, 밀러. 애쉬. 천사님이랑 같이 연기하는 배우 있잖아, 노바말야.”

 

…….”

 

애쉬.

 

그래, 이거 천사님 주려고 밀러가 들고 왔어. 애쉬가 단테에게. 잘 봐. 색이 굉장히 예쁘게 들었어.”


 

애쉬가, 단테에게……?  


순간 멍하던 머릿속이 맑게 개였다. 눈을 끔벅거리며 잠시 눈앞의 꽃을 들여다봤다.  

 

애쉬가 왜 내게 꽃을 선물한 거지? 보들보들한 꽃잎을 가만가만 손끝으로 쓸어보며 꽃다발을 들고 서있는 애쉬를, 그것도 내게 선물하기 위한 꽃을 들고 있는 그를 상상해보았다. 이상하다는 느낌일까……. 안 어울리는 것은 아니야, 그런데 또 어울리는 것도 아니다. 다른 이를 위한 꽃이라면 모를까 날 꺼려하는 그가 왜……?


 

단테 네가 삼일이나 잠들어있어서 걱정했단다. 친한 사람이 병문안을 와주면 좋을 것 같아서 케빈에게 물었더니 밀러씨와 가깝게 지냈다고 하더구나.”


 

……가까워? 내가, 그와? 고개를 돌려 케빈을 올려다봤다. 곤란한 표정을 하고 시선을 피하는 그의 얼굴이 묘하게 울긋불긋하다. 가만히 쳐다보고 있으니 점점 더 뻣뻣하게 굳어지며 조금씩 몸을 뒤로 물린다.  


그러나 나는 그를 다루는 방법을 알아. 힘없는 팔을 조금만 뻗으면, , 지금처럼 그는 재빠르게 다가와 내 손을 잡아준다. 그리고 한 번 내 손에 잡히면 먼저 놔주기 전까지 그는 꼼짝없이 잡혀 있곤 했다.  

 

입술이 조금 찢어지고 뺨에 생채기가 나있다. 아마도 작은 형의 작품인 것 같아 미안한 시선을 보내니 자기도 한 대 때렸으니 괜찮다며 웃어 보인다. 우수한 보디가드이자 수행원인 케빈은 막내 형과 친구이기도 해서 가끔가다 내 신변 문제로 주먹다짐을 하곤 했다. 다른 이들이었다면 있을 수 없는-고용인과 주인이 주먹다짐을 하는- 일이었지만 케빈은 특별하니까.  


톡톡 생채기 아래를 두드리니 똑같은 곳을 때려주었다고 대답해준다.  


 

어제 오후 늦게 짐 싸서 들어왔어. 당분간은 저택에 머물기로 했으니까 매일 볼 수 있을 거야.”


 

굳이 부연설명을 듣지 않아도 충분히 그 과정이 예상되어서 당장 애쉬가 근처에 있다는 것이 기쁘기보다는 미안했다. 그와 가까워지고 싶지만 이런 식은 좋지 않은데. 아마 그는 내가 더 싫어졌겠지. 이제는 진짜로 싫다는 감정에 가까워졌을 거야. 그렇다면 어쩌지.  

 

눈가에 열이 올라서 뜨겁다. 케빈의 손을 놓고 눈을 비비니 그가 안절부절 못하며 손을 잡아내려 그러지 못하게 한다. 유모가 따뜻한 손으로 양 뺨을 잡고 조금 들어 올려서 그녀와 눈을 마주치게 만들었다.  


 

마리아의 독단이긴 했지만 아가, 나는 그 결정이 너와 그 사이의 관계를 개선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단다.  

비록 강제로 불러들여 묶어둔 셈이지만 더 이상 손은 대지 않기로 다들 이야기를 끝냈어. 일단 가까운 곳에서 매일 얼굴을 보고 지내다 보면 어떤 방식으로든 상황은 변해가게 되어 있으니까.”


 

그럴까? 정말로 애쉬와 좀 더 가까워질 수 있을까? 그러나 어떻게? 그는 나를 좋아하지 않는데.

 

유모의 손이 내 뺨을 쓰다듬어서 조금 고개를 기울여 기댔다. 인자한 노부인은 그저 웃으며 특별히 어려운 일은 없을 거라고, 그저 인내심을 가지면 될 일이라고 말해온다. 그리고 인내심은 그 행동력과 더불어 헤르난데즈의 천성이니까. 정말로 별 일 아니라는 듯한 그녀의 목소리에 안정을 되찾았다.  


 

조금 전에 밀러씨가 집으로 돌아왔어. 운동을 하는 것 같던데, 곧 끝날 것 같으니 가보겠니?”


 

애쉬가 집에 와있다는 소리에 두근두근, 가슴이 가볍게 두근거린다. 걱정스럽지만 유모의 격려에 천천히 일어나 그를 보러 가기로 했다.  


나를 보면 분명 인상을…… 인상을 찌푸리겠지만……. 그래도 눈이 마주치는 건 좋으니까.  

언제나 바로 봐주고 있으니까, 이번에도 눈을 마주쳐주겠지. 들뜬 마음이 걱정스러움을 뒤로 밀어 눌렀다.  



 

방문을 열고 복도에 나가기 전, 그래도 한참을 머뭇거리게 된다. 손잡이를 잡고 문을 열기까지는 한참의 시간이 필요했고, 또 주저하며 뒤를 돌아다보니 유모와 케빈이 파이팅 포즈를 취해서 간신히 복도에 발끝을 내밀어 발을 닿는다.  


한 발을 내딛으니 다음은 쉽다. 몸을 완전히 내밀고 몇 걸음 더 걸어 애쉬가 머문다는 방에 조금 가까워졌을 때다.

 

갑자기 발자국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방문이 벌컥 열리고, 안에서 검은 그림자가 불쑥 튀어나온다. 애쉬라는 예상은 충분히 할 수 있었지만 빛을 등지고 있는 바람에 검게 가려져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런 내 기척을 느낀 건지 그가 나를 돌아봤다.  

 

, 눈이 마주쳤어.

 

나를 직시하는 그의 눈동자에 기분이 확 좋아져서, 평소에 하던 것처럼 냉큼 달려가 그에게 매달렸다. 좋은 냄새가 나는 것 같아. 순간적으로 그에게 안기며 느낀 향기는 자신이 쓰는 바디클렌저와 같은 것이었다. 씻고 나온 거구나.  

 

그러나 그를 끌어안느라 기울어진 몸의 균형을 바로 잡을 세도 없이 곧바로 거칠게 밀쳐졌다.  

코끝을 스쳤던 향기는 말 그대로 스치고 지나갔을 뿐으로, 밀쳐짐에 놀라 든 고개에 마주친 그의 눈은 참을 수 없는 노기가 가득 차 있어서.  

 

역시 내가 정말로 싫어진 거구나. 정말로, 싫어진 거야.  

 

순간적으로 눈앞이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아마 케빈이 달려 나와 부축해주지 않았더라면 정말로 그 자리에 주저앉았겠지.  

 

등에 닿는 손이 싫어서 끌어안으려는 그의 손을 밀어내고 그저 팔만을 잡아 몸을 기댔다. 방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더 이상 두 다리로 몸을 지탱할 수가 없어서 자리에 주저앉았다.  

 

뒤에서 쾅 하고, 거세게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린다.  


 

천사님 괜찮아? 안 다쳤어? 인정사정없이 밀쳐내던데.”


 

아냐, 그렇게 밀쳐내면서도 애쉬는 내 몸에 그의 손톱이 닿게 하지 않아.  

 

고개를 저어 괜찮다하니 한숨을 내쉰 케빈이 양 팔 아래로 손을 넣어 몸을 일으켰다. 걸음마를 처음 떼는 아이처럼 그에게 들려 침대에 옮겨지고, 그리고…… 맑아졌던 것이 무색하게 다시 눈앞이 흐려진다.  

 

자꾸만 뒤섞이는 주변의 목소리, 그리고 공기가 울리는 소리에 범벅이 되어 애쉬의 화난 눈동자가 아른거렸다. 이전까지 그는 이렇게 화가 난 눈으로 날 본 적이 없는데. 그저 짜증이 치밀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그런 눈빛이었을 뿐이었는데 이제는 정말로 내가 싫어져 버린 걸까. 정말로? 더 이상 꼴도 보기 싫을까? 더 이상 날 봐주지 않는 걸까?


 

아가, - , 괜찮다, 괜찮아. 그저 그는 우리가 독단적으로 저지른 일에 대해 화가 난 것 뿐이야. 네게 화가 난 것이 아니란다. 아가, 단테, 여길 보렴. ? 내니를 봐.”

 

…….”

 

아가, 숨 쉬어야지, ? 쉬이- , 괜찮아, 천사야? 생각은 그만 하고 여길 보렴. 내가 누구지? ?”

 

내니.  


 

간신히 초점이 맞아 걱정스러운 눈으로 들여다보는 유모와 눈이 마주쳤다. 그러나 힘들어…… 자꾸만 눈앞이 흐려지고 머리가 어지러워져서 유모가 말을 거는데 알아들을 수가 없어.  

 

유모, 유모, 뭐라고 하는지 들리지 않아, 애쉬가애쉬가 날 싫어해. 화를 냈어. 더 이상은 날 봐주지도 않을 거야. 나를 봐주는 사람이 없어져, 그럼 나는? 나는 어디에 있어?  


답답하고 힘들다. 뭔가 이상해. 아까부터 들리는 거슬리는 쇳소리는 어디서- 내 목에서 나는 건가.

 

 

옳지, 옳지, 천천히- 천천히. 아가, 애쉬 밀러는 네게 화를 낸 게 아니야. 우리가 멋대로 여기에 머물게 해서 그런 거야. 너를 밀어낸 것도 그저 조금 놀라서 그랬을 뿐이니까. 아가, 천사야, 내 말 들리니? ?”

 

정말이야? 정말 그런 걸까? 정말로, 내게 화를 낸 것이 아니야?


 

케빈이 입가에 무언가를 갖다 대주고 나서 숨 쉬는 것이 조금 편해졌다. 유모가 계속해서 반복하는 말을 듣고 있으니 아프도록 뛰던 심장도 차분해져서 조금은, 멍하던 머리가 다시 개어간다.  

 

애쉬는 내게 화를 낸 것이 아니야. 나 때문에, 내가 그를 화나게 한 게 아니야. 애쉬는 화를 내지 않았어. 그저 그는 조금 놀랐을 뿐이니까, 그러니까 괜찮아. 괜찮아.  

 

가슴께를 다독이며 유모가 하는 말을 속으로 따라 되뇌인다. 계속 따라하다 보니 통증도 가라앉고,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애쉬.  

그를,  

그가…… 그가 내 옆방에 머물러.  


 

……밀러를 만나면 반갑게 인사하고, 방긋 웃는 얼굴로 맞이해주렴. 낯선 곳에 머물게 돼서 조금 불안할거야.”


 

, 애쉬를 보면, 인사해. 웃으면서. 우리 집은 크니까 처음 온 사람에게는 낯설 수밖에 없어. 그래도 나와는 안면이 있으니까, 다른 사람들 보다는 내가 편하겠지. 그러니까 평소처럼 그를 대해야해.  


 

시간이 많이 늦었으니 지금은 좀 더 자고 내일 애쉬를 만나면 밝게 웃어주는 거야. 알겠지?”


 

토닥토닥, 가슴을 부드럽게 토닥이는 유모의 손길에 조금씩 눈꺼풀이 감긴다. 졸려.  

 

지금은 잘 시간이니까 보러 가는 건 실례야. 그러니까 날이 밝으면 만나서 인사를 해야지. 평소처럼. 그럼 애쉬도 평소처럼 조금 꺼림칙한 눈빛으로 나와 마주 봐주겠지.  

밀어내겠지만 여전히 상냥할 거야. 내게 진짜로 화를 내지는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런데 멋대로 집에 초대해버려서 조금쯤은 화를 낼지도 몰라.  

 

그래도 괜찮아, 나도 누군가가 강제로 어딘가에 데리고 가면…… 데리고…… 가면.  



 

서서히 검게 변하는 머릿속에 순간 무언가가 푸드득,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새의 날갯짓 소리와 비슷해. 그리고 스쳐지나가는 것은 하얀…… 하얀 덩어리. 뭔가. 깃털이 흩날리는 것 같아. 깃털, , 새의 날개, 날개,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

   

 

 


……잠들었지?”

 

, 그런 것 같아요. 호흡기는 떼도 괜찮을까.”

 

닥터를 호출했으니 곧 오시겠지. 그가 조취를 취해줄 거야. 그때까진 그냥 두자.”


 

식은땀을 흘리며 희게 질린 모습에서 별로 편하게 잠들었다는 느낌은 받을 수 없었지만 그래도 일단은 의식불명 상태가 아닌, 잠들어있는 상태라는 것이 중요했다. 지난 며칠간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것에 얼마나 놀랐던가.  

예전 언젠가, 몇 주 씩이나 깨어나지 않아서 건강상의 문제란 핑계를 대고 영화에서 하차했던 때의 악몽이 다시 떠오르는 기분이었다.  

 

그 난리 이후 단테의 연약하고 병약한 천사 이미지는 더욱 확고해져버렸으나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주변에서 깨질까싶어 조심스러운 모습을 보여주는 것에 식구들은 더 안심하기도 했다.  

다만 걱정되는 것은 단테 본인이 무엇을 겪고 있느냐 하는 것.  

 

예전에 그렇게 의식이 없을 때 대체 그 안에서 무엇을 보고 있었던 것인지, 깨어난 단테는 한동안 심각한 신경쇠약에 시달렸었다. 잠도 자지 않으려 하고, 다른 이들과 몸이 닿는 것은 물론 눈 안에 담는 것조차 거부했다.  

 

그저 한없이 불안해하며 몸을 웅크리고 덜덜 떨고만 있었을 뿐으로 가끔은 정말로 혼이라도 나가버린 얼굴로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기도 했다. 그리고 식구들은 경찰 조사 보고서를 통해서야 알게 되었던 어린 희생자들 몇몇의 이름을 중얼거리기도 했었다. 연기할 때를 제외하고는 입 밖으로 작은 소리 한 번 내는 것을 본 적이 없었는데 그때의 단테는 ……다시는 그런 상태로 그리 중얼거리는 가슴 아픈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그나저나 참 모멸 차게 밀어내던데.”


그래, 마리에게서 쉬운 성격이 아니라는 말은 전해 들었지만…….”

 

촬영장에서도 별로 친절하지 않아요. 연기자라면서 무슨 대외적인 모습 같은 건 신경도 안 쓰는 건지, 연기자들이고 스텝들이고 전부다 애쉬 밀러는 단테 헤르난데즈를 좋아하지 않는다! 라고 수군거린다니까. 또 그렇게 밀어내는 대도 졸졸 따라다니는 단테보고 바보 같다는 놈들도 있었고.”

 

…….”

 

아 물론 훌륭하게 처리했으니 그렇게 인상 쓰지 말아요 캐서린, 아 진짜라니까. 댄한테 이야기해서 확실하게 혼구멍을 내줬으니까.”


 

잔뜩 찌푸려졌던 유모의 미간이 스르륵 펴지고 케빈의 입에서 과장된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 덕분에 유모의 손에 꼬집힌 옆구리를 슬슬 문지르며 씻고 나온 것이 무색하게 땀에 젖은 단테의 앞머리를 살살 넘겨준다.  


 

캐서린, 지금 우리 천사님…… 상태 조금 이상한 거 맞죠.”

 

……. 썩 좋은 상태는 아닌 것 같다. 쉬어줘야 할 때를 넘겨도 한참 넘겨버려서 더 그런 것 같아. 이번엔 외부 촬영도 꽤 길었고…….”

 

오늘 일은 기억 못 할 것 같았어요, 아까 반응은…….”

 

아마도 오늘은 밤이 늦어서 밀러를 만나지 못했다고 생각할거야. 그러니까 단테가 혼란을 느끼지 않도록 조금 주의해주자꾸나.”

 

……진짜 저놈 얄미워. 한 대 확 때려주고 싶은데.”

 

그건 댄과 주인어른께 맡겨두고 너는 얌전히 단테나 잘 보살피도록 해. 너까지 나서면 꼴이 우스워진다.”

 

그걸 아니까 얌전히 있는 거잖습니까.”


 

착한 아이로구나, 툭툭 등을 두들기는 것에 케빈이 옅은 한숨을 내어쉰다. 우리 천사님은, 진짜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 같은 이 아이는 모든 것이 너무 어렵다. 언제쯤 네가 편안해질 수 있을까, 언제쯤 네가 그 과거를 떨쳐내고 바로 설 수 있을까.  

섬세하기가 유리세공품과도 같은 이 아이를 대하기가 귀찮아서 그런 것을 바라는 건 아니었다.  


그저 남들처럼 웃고 남들처럼 느끼고 남들처럼 표현하고. 다른 평범한 사람들처럼 지낼 수 있기를 바랄 뿐인데 그것이 이리도 어렵다.  

 

한 번 무너져 내린 정신은 다시 되돌릴 수 없다고들 이야기 하지만 그래도 여기저기 버팀목을 대어주다 보면 어떻게든 일어설 수 있지 않을까.  

 

무너진 채로 있어도 뭐라 할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그래도…… 그래도 바로 선 모습을 보고 싶은 것은 어쩔 수 없는 욕심이다. 우리는 이 아이가 가장 아름답게 웃고 있을 때를 기억하니까. 행복하게 미소 지으며 뛰어다니던 그때를 기억하고 있으니까, 욕심이 나는 것은 어쩔 수 없어.  

 

그래서 애쉬 밀러에게 기대하게 된다. 지금까지 단테가 이런 식으로 매달리고 관심을 표하는 사람은 달리 만나본 기억이 없다. 어쩌면 지금까지의 모든 버팀목들 중에서 가장 크고 튼튼한 것이 되어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생기는 것도 어쩔 수 없다.  


다만 그의 성격이 워낙 ……쉽지 않은 데다 헤르난데즈의 성정 또한 만만치가 않으니 부딪히게 되는 것일 뿐.

   

 

 

 


다음날 깨어난 단테는 유모의 예상대로 전날 밤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다만 애쉬밀러에 집중하여 그와 마주치면 방긋방긋 웃으며 쪼르르 가서 매달렸다가 내쳐지길 반복했을 뿐이었다.  

 

잠에서 깨어나면 조금은 깨끗한 정신으로, 애쉬를 만나기 전까지는 어떻게든 버티고 있다가 그와 만나서 매달리고, 밀려난 다음 기절하듯 잠들었다.  

 


안 보는 척 하면서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는 가족들은 애가 타서 단테를 밀어내는 애쉬에게 이를 득득 갈았지만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가는 일만은 벌어지지 않았다.  

다만 여기저기에 화풀이를 하고 다녔던 탓에 그들의 뒤를 따라다니는 수행원들만 몇 배로 고생을 해야 했다.  

 

그리고 며칠이나 지났을까, 술을 마시고 늦게 귀가한 날 밤, 드디어 애쉬가 매달리는 단테를 그저 못 본 척 하고 밀쳐내지 않았던 그날.  

 

가족들은 뭔가 대단한 것을 길들인 기분이 들어서 달콤한 와인으로 가벼운 축배까지 들었다. 고용인들도 매우 즐거워하여 그가 먹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면서도 다음날 애쉬의 식단에는 꽤나 공들인 메뉴가 몇 가지나 추가되었었다. 그의 방에 갈아준 시트도 부러 햇빛에 한 번 더 내다 말리고, 그가 외출하면 닦아놓는 운동기구들도 더욱 공들여 반질반질 윤이 나도록 닦아두었다.  




 

한 번 그렇게 단테가 매달리는 대로 받아준 이후로 상황은 유하게 풀려가는 듯했다. 단테는 애쉬가 눈에 보이면 냉큼 달려가 답삭 매달려 그 팔에 뺨을 몇 번 부비고 천천히 떨어져 방긋 웃어 보인다.  

그리고 단테의 미소와 마주한 애쉬는 별다른 반응 없이 몸을 돌려 갈 길을 간다.  

 

그 뒤에 방으로 돌아온 단테가 주저앉아버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적어도 다른 사람들의 눈으로 보기에 그들 사이의 공기가 날카롭지 않다는 것이 중요했다.  


 

식구들의 입장에서 단테의 상태가 썩 좋지 않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장기 촬영을 갔다 온 단테는 몇날 며칠을 죽을 듯이 앓다가 다음 며칠은 백치처럼 보내고, 또 며칠이 더 지나야 간신히 조금씩 정신을 차리곤 했었다.  

 

유난히 텀이 길었던 이번의 촬영 이후 촬영팀과 함께 오랜 시간 여행까지 다녀왔으니 상태가 더욱 좋지 않은 것에 대해서도 걱정만을 할 뿐 상황 자체를 이상하게 여기진 않았다.  

애쉬와의 신경전까지 겹쳤으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완전한 외부인인 애쉬 쪽에서 단테의 상태가 좋지 않은 것을 이상하게 여기리라는 것은 가족들 중 누구도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던 문제였다.  




 

애쉬가 저를 더 이상 밀어내지 않으니 잔뜩 긴장해있던 단테의 정신력도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가 자신을 밀어내지 않고 그저 받아주는 것에서 미움 받지 않았다는 확신이 서자 그를 향해 줄곧 곤두세우고 있던 신경이 가라앉고, 그리고 긴장의 끈이 느슨해지니 조금씩…… 정신이 흐려지는 시간이 길어지기 시작했다.  

 

눈을 뜨고 앞을 바라보고 있지만 그 속에서는 무엇을 보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상태, 제대로 생각은 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한없이 고통스러운 기억만을 계속해서 되풀이해서 보고 있는지 겉으로는 전혀 알 수 없는 백치와도 같은 시간이 조금씩 조금씩 길어져간다.  

 

걱정스럽게 바라보지만 주변에서 어떻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시간이 지나서 상태가 나아지기만을 바랄 뿐, 잠들지도 못하고 정신을 놓고 있는 그를 안타깝게 지켜보고만 있었다.  




상황이 좋지 않게 변해간 것은 방 안에 있던 단테를 햇볕이라도 좀 쪼이게끔 케빈이 안아다 수국정원에 앉혀줬던 날 이후부터였다. 웬일로 평소와 다르게 늦은 시각 외출하던 애쉬가 하필 정신을 놓은 단테와 마주쳤던 것이다.  

 

뭐라도 조금 먹일 생각으로 자리를 비웠다 돌아오던 유모가 목격한 것은 다급히 다가와 단테의 시선을 잡아채던 애쉬였다.

다행히 잠깐이지만 그 순간 정신을 차린 단테는 평소와 똑같이 그를 멀뚱히 올려다보았고, 그리고 애쉬는 그대로 몸을 돌렸다. 그가 떠나고 난 이후 허둥지둥 다가온 유모의 앞에서 평소처럼 반짝거리던 단테의 눈동자는 또다시 서서히 빛을 잃었다.  



 

한 번 그런 모습을 보여준 것이 기폭제라도 되었던 것일까. 이후로 며칠, 단테는 단 한 번도 제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이미 눈앞의 사물을 바라보는 것을 전혀 할 수 없이 완전히 내면에 사로잡혀 외부의 것에는 반응하지 않았다. 애쉬와 마주쳐도 그것은 마주한 것이 아니었고, 눈을 뜨고 있어도 깨어있는 것이 아니었다.  

 

집안 식구들에게야 그것은 익숙한 상태였지만 애쉬에게는 아니었기 때문에 그의 반응은 굉장히 신경질적이고, 거칠었다. 하루, 이틀,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기세는 신경질적으로 변해가고, 날카로워졌다. 단테를 바라보는 눈빛에서는 참을 수 없는 화가 뚝뚝 흘러넘칠 지경이었다.  

 

사랑스러운 그들의 천사를 노기에 차 노려보는 애쉬가 식구들에게 달가울 리가 없었기에 그들의 눈초리도 점점 사나워져 갔지만 다행히 유모가 가장 먼저 애쉬의 반응을 짐작했다.  


그로서는 단테의 저 모습이 제 흥미가 떨어져 관심을 끊은 모습처럼 보이겠거니, 단테의 상황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억지로 저택에 감금하듯 잡아둘 때는 언제고 흥미가 떨어지자마자 모른 척, 못 본 척 하는 것으로 보일 테니 화가 날 수밖에 없으리라 이해했다.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던 부분에서 애쉬 밀러가 외부인이라는 것을 새삼 자각한 식구들은 그저 속으로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단테의 상태에 대해 설명해줄 수 있는 것은 직계 가족들의 몫이다. 같은 식구이지만 고용인인 그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에 답답하더라도 상황을 그저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날 밤. 가끔 하던 밤 외출을 감행하던 애쉬 밀러가 때마침 열려있던 방문 사이로 여전히 정신을 놓고 있는 단테와 마주했다. 닥터 요한의 진료 후 단테의 상태를 전달받기 위해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조금씩 빛이나 소리에 반응을 보이기 시작하고 있으니 며칠 이내에 정신을 차릴 거라는, 기쁜 소식을 듣고 돌아온 그들이 발견한 것은 발작을 일으키고 있는 단테와 그런 그를 보며 황망해하는 애쉬의 모습이었다.

   

 

 


+++

   

 

 


나는 이것이 꿈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단순히 기억이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쉬이 깨어날 수 없다는 것도 ……알았다. 이 악몽은-기억은- 너덜너덜 만신창이가 되기 전까지는 나를 놔주지 않았다. 끊임없이 지르는 비명과 할퀴어대는 발톱으로 머릿속을 엉망진창으로 휘저어서 따뜻한 빛과 온기가 있는 현실세계로 나갈 수 없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완전히 망가져버리면 이 즐거운, 나를 망가트리는 유희를 더 이상 즐길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것처럼 아슬아슬한 한계선이 되면 선심이라도 쓴 모양 툭, 하고 등을 떠밀었다.  

그러나 때가 될 때까지는 그 지옥에서의 나날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다시 겪어야만 한다.


 

이번에도 벌써 몇 번째 반복되었는지 알 수 없는 악몽의 시작에 나는 체념하여 몸을 늘어트리고만 있었다. 등 뒤의 살가죽이 찢어지고 뼈를 어루만지는 소름끼치는 고통에 뒤이어 드릴이 갈아내는 소리, 뼈를 뚫고 연결되는 쇳조각의 느낌, 뒤이어 치덕이며 다가오는 제 것이 아닌 살덩어리와 그것을 꿰매는 불덩이처럼 뜨거운 손이 느껴진다.  

 

나를 납치했던 그 괴물은 제대로 마취조차 해주지 않고 몇 번이나 등을 가르곤 했다.  

그러나 한없이 부족한 마취제, 그것조차도 그나마 자신은 굉장히 많은 배려를 당했던 것이라는 것을, 안다.  

 

다른 아이들은 그나마의 마취제도 없이 생살을 찢고 뼈를 갈랐다. 그들의 처절한 비명, 사지가 꽁꽁 묶여 꼼작도 할 수 없던 그들이 유일하게 뻗을 수 있었던 작고 가는 손가락들.  


웃으며 속삭이는 목소리는 다정했다. 끔직했다. 네가 조금이라도 덜 아플 수 있도록 미리 연습하는 거란다. 조금만 기다리렴, 내가 곧 네게 날개를 돌려주마. 너를 잡아놓고 있던 그것들이 잘라버린 날개를 다시 달아줄게. 조금만 기다리렴, my angel.  

 


가족들이 불러주던 따뜻한 단어, 이 세상 누구보다 네가 가장 소중하다며 아끼고 아껴 불러주던 제 애칭이 이렇게 끔찍하게도 들릴 수 있다는 것에 다섯 살의 나는 진저리쳤다.  

나를 천사라고 부르지 말라고 악을 쓰고 거부하자 고작 세상에 내려온 지 몇 년밖에 되지 않았는데 벌써 사탄에 물들어 스스로를 부정하고 있다며 성수로 씻어냈다’.  

 

강제로 물속에 머리를 처박고 물이 공기라도 되는 양 숨을 쉬는 행위를 강요하고, 폐에 가득 물이 차서 더 이상 움직이지도 못할 때가 되어서야 건져내어 심폐소생술로 되살려냈다. 그 뒤로도 몇 번인가 더 반항을 했었지만 돌아오는 반응들이 끔찍해서, 납치 후 사흘 만에 어린 나는 더 이상의 반항을 포기했다.  


그저 다시 한 번, 딱 한번만이라도 가족들을 볼 수 있기를, 그들 품에 안길 수 있기만을 바랐다.  

 

사랑하는 부모님,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조부모님들, 자신을 보석처럼 아껴주는 누나와 형들, 눈이 마주칠 때마다 환하게 웃어주던 다른 식구들.  

 

그냥 작은 형과 함께 집으로 갈 걸, 집에 가라고 했을 때 말을 들을 걸. 내가 나쁜 아이이기 때문에 벌을 받는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고 싶었다.  


 

눈앞에서 흰 새들이 날개가 잘려 죽어간다. 그 날개는 그대로 수술대에 묶인 다른 아이들의 등 뒤로 옮겨져 강제로 그 작은 육체에 옭아매졌다.  

날개를 단 아이들은 팔다리를 구속당해 벽과 천장에 매달렸다. 매달린 아이들은 과다출혈이나 상처의 감염으로 죽어갔다.  

수술부위가 썩어 들어가 여린 등에 매달린 날개들이 후드득 떨어져 내린다.  

하염없이 울면서 그 장면을 지켜보던 어린 나의 눈에서 눈물이 마른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아마도 그때부터 내 정신은 본격적으로 망가졌던 게 아니었을까.  


 

천사에 집착하는 괴물이 속삭였다. 저 아이들이 너 대신에 지옥에 가주는 거라고. 너를 정화해서 새 날개를 달아 하늘로 돌려보내기 위해서 대신 죽어주는 거라고 말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은 이렇게 속삭였다. 날개를 달아주자 몸이 썩어 들어가는 것은 저것들이 악마라서 그렇다. 사탄이다. 저것들은 사탄이라 지옥불에 떨어지지만 너는 천사니까 내가 하늘로 올려 보내주겠다.  

 

그의 속삭임에 아이들은 더욱 공포에 떨었다. 죽고 싶지 않다고 울부짖었다. 그러나 그것도 얼마 지나지 않아 잠잠해졌다. 어떤 방식으로든 이곳에서 탈출할 가능성은 없다는 것과,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버렸기에 모든 것을 체념해버린 것이다.  

그저 고통에 울고, 차라리 빨리 죽어서 그 상황을 벗어나고 싶어 했다.  


 

-……나 정말로 죽으면 지옥에 갈까?

 

어느날 작은 여자아이가 속삭이듯 내게 물어왔다. 등에 새로 단 날개가 결국 감염을 일으켜서 고열에 시달리던 아이의 이름은 매건이었다. 금발 고수머리에 푸른 눈동자를 한 소녀가 열에 들떠 충혈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던진 질문에 같이 걸려있던 마이클이 조금 움찔거리며 반응했다.  

 

-? 천사님, 나 지옥에 가는 거야?

 

눈물이 글썽이다 아래로 툭, 떨어진다. 멍하니 현실감이 없는 시선으로 그것을 바라보다가 어린 나는 느리게 대답했다.  

지옥에 가지 않아. 너희는 천국에 갈 거야.  

 

-정말……? 천국에 갈 수 있어……?

 

천국에 갈 거야. 너희들도 천사니까 갈 수 있어. 지옥에 가더라도 내가 꼭 데리러 갈게.

 

-약속 한 거야, 잊으면 안 돼. 꼭 데리러 와, ?

 

약속 할게. 절대로 잊지 않아.

 

환하게 웃으며 울고 있던 매건의 옆에서 결국 마이클의 작은 몸이 축 늘어진다. 그 애는 내 목소리를 들었을까? 천국에 갈 수 있다는 내 대답을 들었을까? 그리고 다음날 아침 기절하듯 잠들었다 깨어난 내 눈앞에서 매건은 싸늘하게 식은 채로 괴물의 손에 들려 방 한 쪽 구석에 던져지고 있었다.

 

 

그날 이후 나는 괴물이 자리를 비울 때마다 같이 있던 아이들에게 너희도 천국에 갈 거라고 말해주었다. 괴물의 말은 들을 필요가 없다고, 전부 거짓말일 뿐이라고.  

아직 어렸기 때문에 많은 것을 알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저들이 나 때문에 죽어가고 있다는 것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어린 내가 할 수 있던 최선의 일은 그저 나를 진짜 천사라고 믿는 그들에게 너희는 천국에 갈 거라고 말해주는 것뿐이었다.  



 

괴물은 어린 아이들은 모두 천사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날개를 달아 하늘로 올려 보내기 위해 아이들을 납치해서 이런 일을 저지르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괴물의 눈에 들었다.  

 

나를 본 이후로 괴물은 오직 나만을 진짜 천사라고 생각했다. 다른 아이들은 진짜 천사인 나를 발견할 수 없도록 그동안 그를 현혹하고 있던 악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나를 제외한 다른 아이들에게 가혹했다. 죽어버린 아이들에게 미안해서 가슴이 터질 것 같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 잊어버리고 싶을 만큼.  

 

……내가 당했던 육체적인 학대는 다른 아이들에 비할 바가 아니었지만 나는 고작 다섯 살이었다.  

 

한 달 동안 내 앞에서 죽어간 아이들만 열 명이 넘었다. 구출되기 하루 전에 벽에 걸려있던 마지막 아이의 숨이 멎었다. 구출되기 직전까지 나는 내 몸값과 교환될 나의 박제가 어떻게 만들어 질 것인지에 대해 괴물이 그 아이를 통해 보여주는 것을 고스란히 보고 있었다.  

 

너는 날개를 달고도 그것이 썩지 않는구나. 역시 네가 진짜 천사였어. 내가 금방 너를 하늘로 돌려보내줄게. 그리고 남은 네 껍데기는 예쁘게 포장해서 너를 잡아놓고 있던 나쁜 악마들에게 선물해야겠어. 빈 껍질만 남은 것을 보면 얼마나 화가 나서 발을 동동 구를까!  


 

괴물이 웃으며 아이의 배를 갈랐다.  

 

-괴물이 웃으며 내 배를 갈랐다.

 

괴물이 예쁘게 벗겨야 한다고 중얼거리며 아이의 가죽을 벗겼다.

 

-괴물이 예쁘게 벗겨야 한다고 중얼거리며 내 가죽을 벗겼다.

 

괴물이 뿌듯해하며 아이의 빈속에 솜을 채웠다.

 

-괴물이 뿌듯해하며 내 빈속에 솜을 채웠다.

 

괴물이 썩으면 곤란하다고 말하며 아이의 남은 부분을 토막 내 땅에 묻는다.

 

-괴물이 썩으면 아깝다고 말하며 내 남은 부분을 토막 내 먹어치운다.


 

낄낄대며 웃는 괴물의 덩치가 점점 커진다. 너무나 환해서 모든 참상을 하나도 숨김없이 낱낱이 비춰주던 밝은 형광등이 괴물의 덩치에 가려 어두워졌다. 검게 변한 지옥에 아이들의 울음소리와 비명소리가 울려 퍼진다.  

 

까드득 까드득 뼈를 갉아내는 소리, 생살을 찢고 흐르는 피가 스멀스멀 발을 적시고 홰를 치는 새의 날갯짓 소리가 공간을 가득 메웠다. 투둑 투둑 아이들의 등에서 썩어 뼈만 남은 허연 날개가 눈물처럼 떨어진다

내 등에는 아이들이 뻗어오던 작은 손가락으로 만들어진 흰 날개가 달려있다.  


 

눈물 젖은 목소리로 누군가 내게 묻는다. 우리를 구원하러 지옥에 와주는 거지? 익숙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그 목소리의 주인은 누구, 매건? 마이클일까? 아니면 엘리?  

 

지나, 지나일지도 몰라. 다섯 살이었던 나보다도 한 살 어렸던 작은 소녀. 수술대 위서 내려오지도 못하고 죽어버린 그 작은 아이에게 너는 천국에 갈 거라고 속삭여 주었던가?  


 

등이 아프다. 뜨거워. 지금까지 몇 번이나 등 뒤로 손을 돌려 날개를 잡아 뜯었지만 힘이 빠져 떨리는 손끝에는 여전히 꿈틀거리는 아이들의 손가락이 와 닿고 있었다.  

내 등에 매달린 아이들의 작은 손가락이 상처를 헤집는다. 강제로 실밥을 뜯어내고 반쯤 녹아 붙은 뼈와 살점을 손톱으로 긁어낸다. 너무 아파서 숨도 쉬기 어렵지만 나는 오히려 안도했다.  

내 등에 지고 있는 이 아이들의 날개를 뜯어내려는 그 움직임이, 나를, 원망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 같아서.  

 

숨이 멎을 것 같은 강한 충격과 함께 우드득, 한 쪽 날개가 뜯겨 나왔다. 웅크려 몸부림치면서도 피하지 않았다. 나머지 날개들도 뜯어내려는 자그마한 손가락들의 움직임을 느끼며 속으로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다짐할 뿐이었다.  

 

나는 죽으면 지옥에 갈 거야. 나 때문에 죽어야만 했던 그 작은 천사들은 틀림없이 모두 천국에 갔을 테지만 혹시나, 만에 하나, 길을 잃고 잘못 빠진 아이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작은 지나는 너무 작아서 천국으로 데려가주던 천사가 빼먹었을지도 몰라. 꼭 지옥에 내려가서 작은 구석 한군데도 놓치지 않고 뒤져봐야 한다.  

 

우드득 뼈가 갈리는 소리와 함께 날개 하나가 또 뜯어졌다. 비명을 지르며 팔을 물어뜯는다.  

생각, 생각을 해야 해. 기억해야해. 잊지, 말아야 하니까, 겨우 이정도를 못 견뎌서 사고를 할 수 없게 되는 것은, 안 돼, 나는 지옥에 가야하니까.  

 

손톱이 벗겨지도록 바닥을 긁으며 남은 날개에 달라붙는 손가락들을 견뎌냈다. 생각이 드문드문 끊기고 있지만 그래도 잊지 않았어.  

 

마이클, 구름 같았던 고수머리가 고왔던 주근깨 남자아이. 내가 납치당해 왔을 때 이미 등에 날개를 달고 신음하고 있었다. 이름도 옆에 있던 매건이 가르쳐줬었지. 나와 같은 초록색 눈동자는 아마 열에 들뜨지 않았더라면 생기 넘치는 한여름의 나뭇잎처럼 반짝거렸을 테지. 그리고, 그리고…….





 

애쉬.

 

까득 까득 뼈를 뜯어내는 고통 속에서 문득 익숙한, 그리운, 그리고 중요한 이름 하나가 떠올랐다.





 

애쉬.




 

애쉬, ……밀러? ……아니야, 아니야, 너는, 너는…… 애쉬…… 애쉬 샌더슨.  



 

나와 같은 반쯤 풀린 금발 고수머리에 채도만 조금 높을 뿐 연두색에 가까운 내 눈과 가장 비슷한 눈 색을 가지고 있던 소년. 나보다 두 살이 많았고 나와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 했던, 가장 마지막까지 살아 있다가 결국은 토막 나 버려졌던 그 …… 애쉬.

 

나보다 먼저 날개를 달고, 내게 부작용이 나타나기 전에 감염이 일어나 결국 너도 악마라는 소리를 들어야 했던…… 내가 당했을 짓을 먼저 당하고 처참한 모습이 되어버렸던 그 소년.  



 

애쉬, 너는 천국에 갈 거라는 내 말을 거부하고 지옥에 가겠다고 했었지. 지옥에서 저 괴물을 기다렸다가 모두 갚아줄 거라고, 그리고 혹시나 길 잃은 아이가 있으면 보살피고 있겠다고 했어.  

천사인 내가 찾으러 올 때까지, 너희를 구원하러 내가 갈 때까지 기다리고 있겠노라고.  

 

나보다 고작 두 살이 많았던 작은 소년은 그렇게 말하며 내게 오래 살라고 했다. 제가 죽고 난 이후 곧바로 따라 죽을 운명이었던 내게 오래 오래 살아서 괴물이 죽는 것을 보고, 가족들과 만나서 행복하게 살다가 아주 늦게 오라고 했다.  




 

 

애쉬, 너와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을 만났어.  


 

투둑, 잘 뜯어지지 않아 오랫동안 갈작대던 날개가 떨어졌다. 이를 악물고 웅크리며 남은 날개에 와 닿는 손길을 느낀다.  


 

그도 너처럼 강한 눈빛을 가지고 있어. 생긴 모습은 많이 다르지만 내게 오래오래 살다 오라고 말하던 너의 눈처럼, 강하고 올바른 눈이야.  


 

벌써 세 개나 되는 날개를 뜯어내느라 힘이 빠져버린 작은 손가락들이 천천히 살점을 파헤친다.

 

 

지쳐 잠들어 있다가도 네가 깨어 나를 바라볼 때면 그 시선을 느낄 수 있었지. 눈을 뜨고 너를 보면 너는 고통의 와중에도 희미하게 웃으며 좋은 아침이라고 말해주었어.  


 

조금씩 뜯어내는 것은 큰 충격을 받을 때보다 정신을 더 희미하게 만들었다.  


 

언제부터였지, 네가 항상 내 시선을 잡아 눈을 마주했던 것이.  


 

흐릿해지는 시야 안에 나와 눈을 마주치는 네가 있다. 가까워졌다가 다시 멀어지고, 선명해졌다가 흐려지는 네 녹색 눈동자에 누군가의 그림자가 겹치고 있어.

 

 

네 눈을 보라고 말했지. 괴물을 보지 말고, 썩어가는 다른 시체들도 보지 말고, 오직 네 눈만을.

그림자의 눈동자는 너와 다르게 녹색이 아니야. 그러나 곧다. 직선으로, 휘는 곳 없이 똑바로 바라보는 눈빛이다. 그 강인함이 네 눈과 겹쳐 보여.  


 

나는 의문도 표하지 않고 너의 녹색 눈동자를 들여다봤다. 눈을 뜨고 있을 때, 괴물이 방해하지 않는 모든 순간에 우리는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며 시간을 보냈지. 네 눈동자의 색이 흐려지고 빛이 닫혀 사라지는 그 순간까지 우리는 서로의 눈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어.  


 

통증은 가라앉지 않고, 내 정신은 벼랑 끝에 내몰렸다. 이대로 조금만 더 안쪽에 갇혀 있다가는 정말로 모두 부서져 버릴 거야. 지옥에 가야한다는 것조차 기억하지 못하게 될 거야. 그러면 안 되는데. 애쉬, 네가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자꾸만 무언가가 흐릿해진다.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도 흐려지고 있어서 기억나지 않아.  



그때였다.



 

갑작스럽게 악몽의 방이 걷혀나갔다. 순식간에 흐릿하게 걸쳐있던 경계를 벗어나 한 쪽으로 끌려나왔다. 거친 손길로 시야가 잡아채어져 강제로 눈이 마주쳤다.


 

너 뭐야.”

 

………애쉬?

 

구름이 잔뜩 낀 시야 안에 잡히는 것은 누구의?


 

, 뭐냐고.”

 

애쉬?  

 

……애쉬?



 

대체 뭐가 문제야? 사람 신경을 긁는 것도 정도가 있지, 언제까지 이럴 건데?!”


애쉬. 애쉬다. 애쉬구나.

 

애쉬,





 

……, 지옥에 온 거야?”

 

!!…… ……?”


 

애쉬.


 

지나, , 찾았……?”

 

무슨 헛소릴…….”


 

내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그의 손을 잡으려다 썩은 피에 물든 손을 댈 수 없어 아래로 늘어뜨렸다.  


 

……아파…….”

 

……, 너 지금 제정신……인 거냐?”

 

아파, 애쉬. 애들이 날개, 다 못 뜯었는데. 아직 하나 남아있어.”

 

…….”



 

등이 불타는 듯이 아프다. 뜨거워. 마지막 날개는 살점밖에 뜯어내지 못했어.  



 

아파, 아파. 뜯어줘. 손이, 손이 안 닿아, ?”

 

……단테?”

 

미안해, 그렇지만 이거, 다 뜯어내야 해. 이건 내 날개가 아닌걸. 그런데 손이, 안 닿아.”

 

, 그만, 그만해, 뭐하는 짓이야!!!”


 

이건 뜯어내야 하는걸. 손이 잘 닿지 않아, 왜 그 괴물은 내게만 네 장이나 되는 날개를 달아줬던 걸까, 그걸 다 뜯어내는 일은 너무 힘들고 아파. 항상 마지막 날개는 내 손에 닿지 않는 곳에 남아있어서 다른 사람들이 뜯어줘야 하는데. 애쉬, 그러니까, 내 등에, 저것 좀 떼어줘.  


 

피나잖아!! 단테, 이봐, 정신 차려!!”


뜯어야해. 도와줘, 아파, ? 애쉬, 애쉬,”

 

그만해!”

 

애쉬, 뜯어줘, 아파, 아파!! 뜯어, , 아아아악!!”

 

단테!!”

 

뜨거워, 뜨거워, 뼈에서 뿌리가 돋아나 몸속으로 파고들어와. 아이들이, 어렵게 긁어냈는데 결국 뜯어내지 못해서 다시 들러붙어버려. 안 되는데. 뜯어내야 하는데. 간신히 애쉬를 만났는데 이런 더러운 걸 달고 있으면 안 되는데.  

그 괴물에게 네가 달아준 가짜 날개 같은 건 뜯어버렸다고, , 해야, 하는데.

 

   

 

 

 

 

 

 

 

posted by 로단테/카를류안 2014. 3. 29. 03:19



치도님 파트



posted by 로단테/카를류안 2014. 3. 29. 03:19





창백한 얼굴로 숨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고요하게 잠들어있는 어린 동생의 뺨을 쓸면서 마리아는 지금 옆방에서 잠들어있을 야생동물 같은 남자를 떠올렸다. 잘 그을린 건강한 구릿빛 피부, 끝이 치켜 올라가고 선이 짙어 유난히 매서워 보이는 눈, 나름대로 예의를 지키기 위해 걸친 의상 아래 단단히 긴장해있던 몸. 흉흉한 가족들의 기세에도 밀리지 않고 되레 이를 드러내던 ……그것을 무어라 지칭해야 할까. 야생성? ……무슨 짐승도 아니고, 흉포함? 야생성이나 흉포함이나. 자존심. 이게 가장 잘 어울리려나. 실크처럼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정리해주며 그녀는 그것을 자존심이라 부르기로 결정, 혼자 고개를 끄덕거렸다.

   


바쁜 촬영 일정이 끝나고 드라마도 1부에서 단테가 등장하는 신 부분은 모두 완료되었다. 1부 완결까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어서 숨도 돌릴 겸 크루즈 여행을 한다고 했던가. 평소대로라면 그런 파티나 행사 따위 참여하지 않고 얌전히 집으로 돌아와 늘어졌을 텐데, 이상하게도 이번에는 단테가 먼저 여행에 참가할거라고 통보해왔다. 깜짝 놀란 가족들이 그동안 외지 촬영이라 얼굴도 못 봤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냐며 당장 달려왔지만 이미 단테는 짐을 싸서 케빈과 함께 크루즈에 올라타 버린 이후였다. 별달리 알아서 스스로를 챙기는 일이 없는 단테지만 하겠다고 한 일에는 누구보다 빠르단 말이지. 그런 결단력은 헤르난데즈가의 특성과도 같은 것, 자신과 같은 핏줄이란 생각이 드니 새삼 기분이 좋아져서 드러난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한 가닥의 흐트러짐도 없이 가지런히 머리칼을 정리해준 손은 푹 덮은 이불 밑으로 들어가서 열이 올라 따뜻한 손가락에 닿았다. 눈으로 보지 않아도 선명하게 그려지는 예쁜 손. 가늘고 곧게 뻗은 손가락과 길쭉한 손톱은 연분홍빛으로, 깨끗하게 다듬어져 어지간한 여자 손 모델보다 훨씬 예쁜 모양을 하고 있다. 그러나 보이는 것과는 다른 감촉. 한없이 부드러울 것만 같은 단테의 손은 눈에 두드러지지 않는 단단한 굳은살이 잔뜩 박혀있다. 남들보다 오랜 시간 붙잡고 있는 펜에 의해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거치는 고된 단련에 의해서.  

 

보여주는 것만을 보는 사람들은 단테의 이 녹아버릴 듯이 부드러운 외형만을 보고 툭 치면 무너질 것 같다는 이미지를 떠올리곤 하지. 그러나 의외로 단테가 맡아 연기하는 역들은 굉장한 체력을 요구하는 것들이 많다. 이번에 카테라에서도 마찬가지로, 많이 달리고 많이 움직이는 활발한 동물인간의 역할을 맡고 있으니까. 이레와 단테의 갭이 상당히 커서 잘 인식하지 못하지만 그 이레를 연기하는 것이 이 단테다. 선천적으로 근육이 많이 두드러지지 않는 부드럽고 가느다란 체형이라서 그렇지 무술사범들이 혀를 내두르게 만드는 몸이다.  

 

다행이지 뭐야. 운동 좀 한다고 근육이 우락부락하게 붙어버리는 다른 남자아이들을 생각해보면, 우리 천사는 얼마나 예쁜가 말이다. 겉보기에는 한없이 부드럽고 연약하게 보이지만 사실은 보디가드 두셋과 겨뤄도 지지 않을 만큼 강하다니, 그 의외성이야말로 우리 천사의 매력 포인트 아니겠어?

저절로 나오는 웃음에 실룩거리는 입가를 굳이 진정시키진 않았다. 대신 힘없이 축 늘어진 가는 팔목과 손을 어루만졌다.

   


애쉬 밀러, 그 아이가 단테를 꺼려하는 이유는 굳이 그 입으로 듣지 않아도 충분히 유추가 가능했다. 으리으리한 부잣집 막내아들, 천사 같은 외모에 말도 하지 않고 얌전하니 어린애 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보디가드며 전담 수행원이 24시간 따라다니는데다 가족들의 과해보이는 사랑과 보호까지.  


이건 비단 밀러 그 아이에게서만 아니라 흔히들 상류층이라 부르는 이쪽 세계에서도 썩 좋은 눈초리를 받지 못하는 형태다. 그나마 단테가 진짜 나이차이가 많이 나는 막내이고 원래도 가족적이던 헤르난데즈가의 가풍, 보기 좋은 외형과 철저한 자기관리로서 단 한 점의 스캔들도 터지지 않았던 오랜 연예계 생활 등 남들이 보기에 책잡힐 만한 일은 건수조차 만들어내지 않았기 때문에 조용한 것일 뿐. 그저 아무리 애가 예뻐도 그렇지…… 정도에서 끝낼 수 있는 것은 칼 같은 관리가 없었더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나마도 투덜거리는 것은 연예계 관련 종사자들이나 매스컴에 많이 오르내리는 이들 밖에 없다.  

헤르난데즈와 진짜교류를 가지는 큰손들은 헤르난데즈가 왜 이렇게 단테를 감싸고도는지 이유를 아는 이들이니까, 대외적으로 이 아이가 유리온실 속의 화초처럼 비춰지고 가문이 팔불출에 못 말리는 막내콤이란 소리를 들어도 전혀 이미지에 타격을 주지 않는다.

   


…… ……

 

자그마한 물방울이 규칙적으로 떨어져 내리는 소리가 들린다. 문득 고개를 들어 중요한 영양분을 단테에게 공급하는 약 팩을 올려다보다가, 그 떨어지는 물방울이 흐르는 길을 따라 이불아래 감춰진 다른 손까지 시선이 닿았다. 벌써 삼일 째다. 아이가 이렇게 의식 없이 누워만 지낸 것이.  

 

 

태어나기를 약하게 태어난 것은 아니었다. 어머니는 꽤나 노산이었지만 건강히 단테를 태내에서 길러냈고, 또 무사히 자연분만으로 이 천사를 세상 밖으로 끌어냈다. 몸무게도 평균이었고 태내에서 크게 문제가 생길 일 또한 일어나지 않았으며, 유전적인 병이나 다른 문제들 또한 전혀 없었다. 걱정했던 것이 무색할 만큼 건강하게 태어났던 것이 단테였다. 짧은 기간이지만 어머니의 모유를 먹고 자랐고, 잔병치례 한 번 한 적 없이 위험한 시기를 무사히 넘겼다.  

 

작고 꼬물꼬물한 단테는 까다롭지도 않아서 누구의 품에나 잘 안기고 누구에게나 잘 웃어주는 사랑스러운 아기였다. 정말로 하늘에서 내려온 아기천사 같았지. 물론 지금도 천사지만 말이야. 한창 사춘기였던 막내 다니엘이 방황을 끝내고 스스로를 다지게 만들었을 정도로 단테는 사랑스러웠다.  


 

아장아장 걸을 무렵에는 형들과 누나들, 부모님과 조부모님들을 졸졸 따라다니며 아직은 제대로 나오지 않는 발음으로 뭔가를 옹알거리곤 했었다. 하얀색 레이스가 달린 아기옷을 입고 혹여나 다칠까봐 온 방에 깔아둔 푹신한 러그 위를 작고 통통한 발로 아장아장 걸어 다녔다. 지켜보던 사람들과 눈이 마주치면 방긋 웃고, 서툰 걸음걸이에 가끔 넘어져도 깜짝 놀라 달려오는 식구들이 무색하게 혼자 데굴데굴 울지도 않고 오히려 재밌다는 듯이 꺄르륵 웃곤 했지.  

처음 몇 번의 납치 시도를 겪고 나서는 겁이 많아졌었지만 그것도 이내 극복해냈을 만큼 어린아이답지 않게 정신력도 강했다.  

 

그러나 그날 이후 모든 것들이 틀어져버렸다.


 

너를 쇼에 내보내는 게 아니었는데. 속으로 중얼거리며 허리를 숙여 단테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어린 나이에 자신의 브랜드를 런칭하여 승승장구하던 디자이너이자 사업가.  

소중한 것일수록 자랑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그때 알게 되었다.  

 

단테가 너무 예뻐서 아기 옷을 디자인하던 것을 시작으로 점차 연령대의 폭을 늘려나가고 있었다. 지금은 의류 외에도 다양한 것들에 손을 대고 있지만 당시에 밀고 있던 주력은 아기와 엄마, 그리고 가족. 가족을 주제로 했던 패션쇼를 기획하면서 자신의 가족들을 자랑스럽게 내보이고 싶었다. 여러 가지로 바쁜 둘째 윌리엄과 오래전부터 잡힌 약속이 있던 조부를 제외하고 부모님과 막냇동생 둘, 외조부모님과 할머니가 등장해서 패션쇼의 피날레를 장식했다.  

다니엘의 품에 안긴 단테는 그날따라 더욱 더 천사같이 예쁘고 사랑스러웠다.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곳은 처음이면서 겁먹지도 않았고 반짝반짝거리는 눈으로 자연스럽게 주변을 둘러보는 모습에서는 여유마저 느껴졌었다. 오히려 긴장한 것은 다니엘로, 단테를 안아든 팔로 아이의 옷자락을 꽉 움켜쥐고 있어서 웃음을 터트리게 만들었지.  


무사히 쇼가 끝나고 남은 것은 뒷정리와 파티. 자신은 그때 사람들을 상대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다니엘은 단테와 함께 일찍 집에 들어가고 싶어 했지만 아이가 그것을 거부했다. 소란스럽고 화려한 파티장이 매우 마음에 든 모양으로 할아버지 할머니들이랑 있다가 집에 들어가겠다며 다니엘을 쫓아냈다고 한다. 부모님은 일이 있어서 먼저 들어가셨고, 오랜만에 젊은이들 노는데 끼어서 즐겁다며 조부모님들만 남아계셨었는데…….  


 

단테를 끌어안고 있던 외할아버지가 배고파하는 아이에게 음식을 덜어주기 위해 아이를 잠깐 내려놓았고, 그리고 ……단테가 사라졌다.


 

정말로 잠깐일 뿐이었다. 시간으로 따지면 할아버지가 아이를 내려놓고 고개를 돌려 접시를 들어 올린 다음, 아가 뭐가 먹고 싶으냐- 하고 물어보는 그 찰나의 순간. 단테는 고작 다섯 살이었지만 매우 영리했고, 가족을 걱정시키는 장난은 치지 않는 어른스러운 아이였다. 그런 단테가 사라졌다. 당장 비상이 걸려서 파티장을 봉쇄하고 경찰을 부르고 사람을 풀어 주변을 뒤졌지만 아이는 마치 그 자리에서 증발해버린 것처럼 사라져버렸다.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어. 단테를 부르며 울부짖는 할머니와 할아버지, 사방을 뒤지는 보디가드들, 같이 주변을 뒤지던 모델들과 파티 참가자들에 곧이어 울려 퍼지던 사이렌소리.  

 

그 뒤에 일어난 일들은 마치 지옥과도 마찬가지였다. 울부짖으며 자책하시는 외할아버지와 위로하시는 할머니들, 실신해서 실려나간 어머니와 급하게 귀국하셨던 할아버지, 단테와 함께 남아있을 것을 그랬다며 실성한 사람처럼 중얼거리던 다니엘.  

 

그나마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이 윌리엄이었다. 헤르난데즈의 후계자답게 처신을 잘 했었어. 침착하게 경찰들과 납치사건 전담 수사국의 지시를 따르고, 가족들을 추스르고, 그들이 추진하고 있던 행사들이 주체들의 부재에도 타격을 받지 않도록 잘 조율했다.

 

대단한 가문의 귀한 막내가 납치당했기 때문에 수사에 착수하는 것도 순식간, 그러나 납치된 아동의 생존율이 제로가 된다는 24시간이 훌쩍 지나도록 납치범에게서는 그 어떠한 연락도 오지 않았다.  


아무것도.  


 

지옥 같은 시간이었다. 세상이 모두 무너져 내렸다. 하루, 하루 시간이 흘러갈수록 엉망진창이 되어갔다. 더 이상 괴로울 것은 없을 것처럼 힘든데, 다음날이 되면 또 어제보다 더욱 괴로웠다.  


우리의 천사, 하늘이 내려준 선물, 사랑스럽게 그지없는 보물. 방긋 방긋 웃던 아이의 웃음이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우리들을 부르며 울고 있는 모습만이 떠오르고, 피투성이가 되어 움직이지 않는 아이의 꿈을 꾸고 비명을 지르며 깨어난다.  

 

일주일이 흐르고, 열흘이 지나고, 보름이 되었을 무렵에는 더 이상 단테가 살아있으리라는 것은 기대도 할 수 없었다. 몸값을 노린 단순 범죄였더라면 납치 하자마자 연락이 왔어야 한다. 늦어도 이삼일 이내에는 연락이 와야 했다. 아이가 예뻐 팔기 위해 납치한 것이더라도 그 과정이 드러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감시의 눈들이 번뜩이고 있었다.  

남은 것은 단순 변태 성욕자, 혹은 살인마가 본인의 쾌락을 위해 납치했다는 가설밖에 남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범죄자가 수많은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파티장에 들어와서 단테를 노려 납치해간다는 것도 이상했다. 몸값을 노려 표적을 정하고 납치했다는 것이 가장 타당한데 아무런 연락도 없으니 속은 타들어가고 아이가 살아있을 확률은 한없이 제로에 수렴했다.  

……그리고 그 와중에 외할아버지가 결국 쓰러지셨다. 단테가 납치된 것이 전부 본인의 잘못이라 식음을 전폐하고 아이를 찾아 헤매시다가 마음의 병이 깊어져서 버티질 못하셨다.  

 

외할아버지의 병세가 깊어지고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갔다. 헤르난데즈의 대저택은 생기를 잃고 버석하게 말라갔다. 더 이상은 혹시나, 혹여나 하는 희망조차 가질 수 없었다. 그저 무사히 그 영혼이 떠난 몸이라도, 찾을 수 있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납치범에게서 연락이 온 것은 한 달 하고도 이틀이 지나던 날 새벽이었다.


 

낡은 신문지에 둘둘 싼 작은 소포 하나가 저택의 정문 앞에 떨어져있었다. 아이를 찾고 싶으면 오백만 달러를 지정된 스위스의 계좌에 입금하라는 내용과 함께, 아이가 살아있음을 증명해주는 비디오테이프가 들어있었다.  


 

……….”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작은 테이프를 재생장치에 밀어 넣던 순간. 그때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아직까지 온 몸이 싸늘하게 식는다. 손안에 잡고 있던 단테의 손을 좀 더 꼭 깍지 껴 쥐었다.  


 

-, 인사해야지?

조금 치지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테이프는 다짜고짜, 납치범으로 추정되는 이의 목소리로 시작 되었다. 어둡고 흐린 공간. 아마도 공사 중 버려진 건물 같은 곳으로 시멘트와 철근이 그대로 보이는 곳이었다. 화면이 비추고 있는 곳은 빛과 그림자가 절반씩 드리워져서 그 아래에 무언가가 있다는 것만을 알 수 있었을 뿐, 자세히 알아보기가 힘들었다. 일부러 그런 식으로 찍은 거였겠지.  

 

-어서 일어나렴.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어.

움찔.

그림자 속의 덩어리가 가족이란 말에 움찔거렸다. 보고 있던 가족들의 심장도 덩달아 덜컹거렸다. 화면 속, 그림자에 가려진 조그마한 덩어리가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털이 달린 무언가를 덮고 있었던 모양으로, 그 아래에 그들이 익히 알고 있는, 다시 볼 것을 바라 마지않았던 백금발이 빛에 닿아 조금씩 드러났다.  

 

아이가 살아있다는 것에서 기쁨의 눈물을 흘리던 가족들은 그러나  

 

이윽고 빛 아래 모두 드러난 단테의 모습을 보고 숨 쉬는 것을 잊었다.


 

-아주 예뻐…… 그래. 천천히 이쪽으로 돌아보렴.

모포처럼 덮고 있다고 생각했던 무언가가 사실은 아이의 등에, 어깨에 붙어있다는 것. 피가 흐르고, 검은 실로 보란 듯이 꿰매어져 있었다. 검고, 붉고, 상처투성이인 그 작은 등에 달린 것은  


……날개였다. 하얀 새의 날개.  


 

-이쪽을 봐. 엄마 아빠한테 인사해야지? , 여기 보고- 안녕- 해야지.

주춤 주춤 앞으로 돌아서는 단테를 보면서 비명을 지르지 않기 위해 입을 틀어막고 숨을 삼켰다. 자그마한 단테의 몸에 힘겹게만 보이는 커다란 새의 날개가 하나, , , 네 개. 심하게 마르지는 않았지만 창백한 얼굴, 몸 상태가 많이 좋지 않아 보이는 안색. 생기라곤 한 점도 느껴지지 않는 마른 눈을 한 작은 아이가 웃으라 말하는 화면 속 목소리에 기계처럼 입 꼬리를 올려 방긋 웃는다.  

 

-이제 집에 가는 거야. 좋지?

끄덕끄덕. 끄덕거리는 고갯짓이 힘겨웠다.  

우리들의 작은 천사는 진짜인양 날개를 달고 살아있지 않은 것 같은 모습으로 웃으며 우리에게 안녕을 고했다.  


 

할머니들은 이미 혼절하셔서 수행원들과 주치의에 의해 다른 방으로 옮겨졌다. 할아버지도 가슴을 부여잡고 안정제를 투여 받고 계셨고, 무섭게 굳은 얼굴을 한 아버지는 숨이 넘어갈 것처럼 소리죽여 오열하고 있는 어머니를 부서져라 품에 안고 계셨다. 혼이 나간 듯한 얼굴을 한 다니엘은 멍하니 검게 변한 화면만을 주시했고 윌리엄은 겹친 손 위에 이마를 댄 채 고개를 푹 숙였었다.  

 

나는…… 나는 어쩌고 있었더라. 아가, 나의 천사, 사랑스러운 우리 막내. 너의 그 처참한 모습을 보고 나는 숨도 쉴 수가 없었다. 차라리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때보다 네가 그렇게 살아있는 모습을 봤을 때가 더욱 고통스러웠어. 얼마나 아팠니. 얼마나 무서웠니. 얼마나 우릴 찾았을까. 사랑하는 네가 그런 짓을 당하는 동안 우리는 얼마나 편하게, 그저 네가 살아있기만을 바라며…….

   

 

 


이를 악 물고 입 안의 살을 짓씹어도 가슴을 울리는 통증은 가시지 않았다. 그저 약하게 숨을 내쉬는 단테의 어깨에 기대 그 숨소리를 듣고, 심장이 뛰고 있음을 확인하고, 네 등에 추악한 그것이 붙어있지 않음을 더듬으며 그날의 고통이 가라앉기만을 기다린다. 그날로부터 벌써 십수년이 흘렀지만 이 고통은 사라지지 않는다. 형벌이라고 생각한다. 사랑한다 말해놓고 지키지 못했던 그 죄에 대한. 네가 태어난 곳이 헤르난데즈여서 다행이야. 네게 부족한 것들을 억지로 채워 넣지 않아도 뒤를 든든하게 받쳐줄 수 있는 그런 집이라서 다행이다.

   

 

별달리 특색 지을 만한 내용-주변-은 나오지 않았지만 다행히 아이의 소재는 순식간에 파악되었다. 특수기동대가 투입되고, 비디오테이프를 전달받은 지 반나절 만에 단테는 비디오 속의 그 모습 그대로 가족들 품에 돌아올 수 있었다. 범인은 사살되었다고 했다.  




 

만신창이가 되어있는 아이는 곧장 전속 의료진이 포진하고 있는 병원으로 옮겨졌다. 급히 행해진 검사들을 통해 날개가 아이의 몸에 박혀있기는 하지만 별달리 해악한 질병에 감염되어있지는 않았고, 간단한 수술로 쉽게 제거할 수 있도록 되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만 담당의는 어떤 세균이 감염되어 잠복하고 있을지, 그리고 어떤 약물 등을 사용했을지는 아직 알 수 없기 때문에 그 결과가 어찌될지는 모른다는- 절망 반 희망 반절의 답변을 해왔다. 그래도 살아있으니 되었다고 생각했다. 죽은 줄 알았던 아이가 살아 돌아온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다치고 병든 것은 천천히 고쳐나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아이가 다시 기운을 차리면 예전처럼 아름답게 웃어 주리라는 기대를 품을 수 있었다.  

 

의료진은 시간을 지체할 것 없이 어떤 문제를 일으킬지 알 수 없는 날개부터 제거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그 와중에, 같은 병원에 입원 중이던 외할아버지가 단테의 귀환 소식을 듣고 힘겹게 몸을 일으켜 수술에 들어가기 전의 아이와 마주쳤다. 텅 비어 죽어버린 눈동자, 미동도 없이 축 늘어진 몸, 그리고 ……그 등에 매달린 네 개의 날개.  

 

할아버지의 건강이 좋지 않았을 때라 이런 모습은 보여주지 않으려 했지만 부지불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아이의 처참한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은 외할아버지는 심장발작을 일으키셨고, 그리고 단테가 수술실에서 나오기도 전에 결국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나시고야 말았다.

   


정말 정신을 차릴 수 없이, 허리케인처럼 휘몰아치는 큰일들의 연속이었어. 너를 찾았지만 너는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상태로 그런 모습이 되어있었고, 외할아버지는 그렇게 돌아가시고

그것은 떼어내 버렸지만 한 달의 후유증은 일 년이 넘도록 갔다.  

 

상처가 낫지 않아 언제나 열이 오르고, 나아간다 싶으면 다시 곪아서 피고름이 흘러내렸다. 웃음이 끊이지 않던 사랑스러운 네가 표정 없는 얼굴로 고통스럽게 울부짖을 때마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어.  

아가, 사랑하는 나의 천사. 네가 잡혀있던 그곳에서 수많은 시체를 발견했다. 네가 납치된 것보다 몇 년도 전에 사망한 시체부터, 네가 납치당한 이후에 사망한 십 수 명의 아이들까지. 대체 네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네가 말하지 않는 그곳에서의 시간, 그 안에서 너는 무엇을 겪었기에 이렇게나 부서져버린 걸까.  



 

하늘에서 갓 내려온 아기 천사처럼 언제나 행복하게 웃고 있던 네게서 웃음이 사라지고, 말이 사라지고, 한 순간이라도 눈을 떼면 위험한 짓을 한다. 걸음조차 제대로 걷지 못해 비틀거리다 넘어지곤 해서 저택 전체에 푹신한 바닥을 다시 깔아야 했고, 가끔은 창문을 열고 뛰어내리려고 해서 창문마다 철창을 설치해야했다. 자꾸만 등 뒤로 손을 돌려 등을 긁어댔다. 상처가 다 낫지 않았을 때에도 그런 행동을 해서 천을 덧댄 수갑으로 움직임을 제한해야 했을 때도 있었다.  

 

단 한 순간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저택 내부 아이의 동선을 따라 감시카메라가 설치되고, 아이의 주변에는 수행원들을 사교대로 두명씩 여덟명을 붙였다. 자꾸만 정신을 놓으려고 하는 아이를 붙잡기 위해 가족들이 매일 아침 점심 저녁 시간이 날 때마다 들러 끌어안고 쓰다듬고 사랑한다 사랑한다 속삭여주어야 했다.  

 

자해의 횟수가 줄어들고 가족들과 다시 눈을 맞추기까지 2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정신과에서 다양한 종류의 치유를 목적으로 한 상담을 받고 놀이를 하면서 단테가 어느 정도 정상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길을 발견해냈다. 그게 연기였다. 단테는 자신이 스스로가 아닐 때에야 비로소 안정을 되찾았다.  

 

가문에서는 아이를 위해서 단테에게 지워졌던 기존의 삶을 모두 벗겨내었다. 사랑스러운 우리들의 천사가 조금 더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랐고, 그것을 위해서라면 가문의 전통과 위신 따위는 얼마든지 내팽개칠 수 있었다.  




 

연기자의 삶을 살면서 너는 조금씩 조금씩 안정되어갔지. 네가 아닌 다른 사람을 연기하면서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을 배워갔어. 연기를 하지 않을 때의 너는 여전히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지만 그래도 나는 네 두 눈에 반짝임이 돌아온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열 살이 넘을 무렵부터 거의 온전히 정신을 차릴 수 있게 된 너는 우리가 바라는 대로 네 한 몸 지킬 수 있도록 노력을 아끼지 않았지. 연기를 하지 않을 때 맑은 정신으로 버티는 시간은 길지 않았지만 그 짧은 시간동안 발휘하는 집중력은 무서울 정도였다.  

 

가정교사를 통해 공부한 것들만을 가지고 원래 가기로 결정되어있던 대학에 진학했을 때 할아버지가 그 입학증을 들고 엉엉 울어버리시는 바람에 큰 소란도 일어났었지. 네가 처음으로 케빈과의 대련에서 그를 이겼을 때 네 수행원들이 모두 울음을 터트리던 것도 꽤 즐거운 일이었다.  

 

네가 한 가지 한 가지, 남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무언가를 이루어낼 때마다 감동받는다. 네가 혼자 살아갈 수 있게 될 때까지는 아직도 많은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우리는 네가 스스로 설 때까지 충분히 기다려줄 수 있으니까. 지금까지처럼만 살아내 주면 좋겠어.  



 

꼭 쥐고 있던 아이의 손에 조금 힘이 들어온다. 움찔거리는 것을 느끼고 퍼뜩 고개를 드니 열기가 다 가시지 않은 몽롱한 눈으로 내 천사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잘 잤니?”

 

…….”

 

이번에는 조금 오래 잤어. 그런데 깨어나는 시간은 너무 일찍 인걸.”

 

내 말에 단테가 입 꼬리를 살짝 올리며 미소 지었다. 삼일이나 잠들어 있었어. 숲속의 잠자는 왕자도 아니고. 투정이 섞인 농담에 속눈썹이 풍성한 눈까지 휘며 사르르 웃는다. 자다 깨어난 아이가 이렇게 웃게 된 것도 몇 년 되지 않은 최근의 일이었다.  


 

그렇게 자고도 또 잠이 오는 건지 느리게 눈꺼풀을 깜박깜박 하는 단테를 폭 끌어안고 아이가 느리게 자신의 등을 토닥거리는 것을 느끼면서 조용조용 귓가에 속삭여주었다. 내일 일어나면, 깜짝 놀랄 선물이 옆방에 있을 거야. 선물이라는 말에 조금 고개를 갸웃하지만 이내 끄덕끄덕하면서 천천히 잠들어간다.  



 

내 천사야, 나는 네가 그에게서 무엇을 보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네가 본 그것이 네게 도움이 될 수만 있다면 그가 어떤 사람이건 충분히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 다른 가족들 모두 마찬가지일거야. 다만 당장은 네가 아팠고, 또 그의 성정 또한 쉽지 않으니 부딪치는 거지만 사실은 그가 어떤 사람이든 관계없다고 생각하고 있을 거야.  

 

또래의 친구로서도 좋고, 많이 다른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을 통한 경험의 축적도 나쁘지 않다. 말랑말랑한 가슴을 가진 예쁜 아가씨는 아니지만 혹시나 네가 그를 연애의 감정으로 보고 있더라도 괜찮아. 네가 원한다면 그를 감금해서라도 네 곁에 붙여놓을 테지만 너는 그런 것을 원하지 않을 테니까, 그저 근처에 머무르는 정도 까지만 하고 더 이상 손대지 않으마.  

 

그와의 사이에서 어떤 관계가 진척될는지, 무엇을 풀어가야 할지는 알 수 없지만 모든 것은 네게 맡길게. 사랑스러운 나의 천사, 우리의 보물.  

 

천사라는 네 애칭을 스스로 극복해냈던 것처럼 복잡하게 꼬인 것 같은 그와의 관계도 어떻게든 네 스스로 풀어내리라고 나는 믿고 있다. 그 과정에서 상처를 받고 네가 울어도 화풀이는 할지언정 손을 대지는 않을 거야.  


……할아버지와 댄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일단 아버지와 윌은 동의 했다. 당분간 우리는 조금 바빠서 한동안 집에는 잘 안 들어올 거야. 아이들도 본가에는 오지 못하도록 손을 써둘 테니까…….”  

 

어느새 새근새근 잠들어버린 천사의 보드라운 뺨에 가볍게 키스하고 몸을 일으켰다. 약이 떨어지는 속도를 조금 더 느리게 조절해놓고, 이불을 잘 덮어주고 방을 나선다. 완전히 나서기 전 다시 한 번 잠든 단테의 모습을 눈에 담고 천천히 문을 닫았다.  


단테의 방문을 떠나 애쉬 밀러가 잠들어있을 그 방 앞을 지나오면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그 안에 있는 남자를 떠올린다. 스트레스에 약하긴 해도 체력적으로 매우 건강한 단테가 삼일이나 앓아눕게 만들다니,  

 

조금 괘씸하지만-. 단테가 앓아누웠다는 것은 그만큼 그를 신경 쓰고 있다는 뜻이니까. 으르렁거리던 그의 금빛 눈동자가 떠오른다. 갈색이지만, 금빛이 도는 예쁜 눈.  

 

흐응. 호랑이나 사자같이 커다랗고 느긋한 맹수 보다는 표범이나 재규어 같은 느낌의 맹수다. 천사 같은 단테 옆에 세워두면 그림은 썩 나쁘지 않겠어.  



 

다음에 다시 만날 때에 그저 사납기만 하던 그 눈동자가 어떤 빛을 띠고 있을지 조금 기대된다.







posted by 로단테/카를류안 2014. 3. 29. 03:18



치도님 파트



posted by 로단테/카를류안 2014. 3. 29. 03:18


[외면]




“오 나의 천사, 사랑스러운 내 아가!”

“내 아들이다, 저리 비켜!”

“내 동생이야, 아빠야 말로 저리 비키시지?”

“내가 낳았다!”

“낳았다고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건 아니지 어머니.”

“이틈에 방에 올라가자, 천사야. 이리와.”


시끌벅적. 외지로 촬영을 다녀온 날이면 언제나 벌어지는 눈앞의 광경은 익숙한 것이었다. 인식하지 않고 있던 미묘한 긴장감이 스륵 풀리는 느낌도 나쁘지 않았다.
자신을 먼저 끌어안고자 투닥거리는 가족들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큰형이 슬그머니 손을 붙잡고 끌어당긴다. 손에 들고 있던 작은 가방은 어느 샌가 형에게 넘어가있었다.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형은 손이 참 빨랐다. 형은 내가 한 박자 느리기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의식하지 못하는 부분에서 일어나는 일이니까 빠르다고 느껴질 수밖에.


오랜만에 돌아온 내 방에 들어와서 형이 앉혀주는 대로 침대에 앉았다.
미리 준비되어 있던 물수건으로 얼굴을 닦이고 손을 닦이고, 발을 닦아준 형이 다시 몸을 훌쩍 들어서 바르게 눕혀주고 이불을 덮어준다.
나와 비슷하지만 똑같지 않은 형의 올리브색 눈을 가만히 올려다보니 ‘피곤한 거 아니까 얼른 한숨 푹 자고, 일어나서 같이 저녁을 먹자’고 웃으며 말해 와서 고개를 끄덕였다.

현관에서의 소란스러운 맞이함, 그리고 큰형이 방에 데리고 올라와서 간단하게 몸을 닦고 토닥토닥 재워주는 것은 아주 어릴 때부터 쭉 해왔던 일이었다.
성년이 지난지가 언젠데 아직까지도 애 취급하느냐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냥 편하다. 이마를 가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는 형의 손을 붙잡으니 웃으며 코끝을 살짝 쥐어온다.


“잠들 때까지 옆에 있어줘?”


조금 졸리다. 고개를 끄덕끄덕하니 웃으면서 눈을 감으라고 손으로 슬쩍 눈꺼풀을 내리누른다. 얌전히 따라 눈을 감고, 토닥토닥 가슴을 두드려주는 손길에 천천히 잠에 빠져들었다.
따뜻한 온기가 가슴을 두드릴 때마다 몽실몽실하게 온 몸으로 퍼져나가는 기분이 든다.

문득 가족들의 손과는 다르게 차가운 손이 떠올랐다.
맡 은 역할에 걸맞게 체온이 낮은 그 손, 그러나 닿아오는 감각은 형의 손과 다르지 않았다. 차갑지만 차갑지 않아- 가슴을 토닥이는 형의 팔을 붙잡고 조금 웅크렸더니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애교가 늘었네, 우리 천사’ 라고 말해준다.








잠에서 깨어난 것은 어슴푸레하게 노을이 방 안을 적실 무렵이었다. 누운 채로 눈을 끔벅거리다가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형이 켜두고 나간 듯한 베이비 모니터가 깜박깜박 작은 불빛을 비추고 있었다. 내가 잠들었을 때 억지로 깨우지 않는 가족들이 애용하는 물건이라 낯설지는 않았다.
가만히 보고 있으니 노크하는 소리가 들리고, 유모와 큰누나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엄마만큼 나이가 많은 유모는 다정하게 잠에서 덜 깬 내게 키스하고 몸을 일으켜준다.
누나는 일어난 나를 꽉 끌어안고 양 뺨에 립스틱 자국이 진하게 남도록 키스를 퍼부었다. 방에 딸린 욕실로 가서 세수를 하고 나오니 유모가 갈아입을 옷을 준비해주어서 그것으로 갈아입었다.

양 팔에 두 여인을 끼고 식당을 향하면서 누나가 저녁에 가족들과 자쿠지에 가자는 말을 꺼낸다. 고개를 끄덕끄덕 그러고마 하고 도착한 식당에서는 또 식사 이전에 가족들에게 순서대로 안겨 키스세례를 받았다.
누나의 남편과 큰형의 부인, 어린 조카들, 막내 형의 애인에 할머니 할아버지 외할머니까지 모두 모여 있어서 식탁에 앉기까지는 조금 또 시간이 걸렸다.


외할머니가 데려온 제빵사의 빵이 굉장히 맛있었다.
보들보들한 속살을 뜯어먹고 옆에서 아빠가 내미는 포크에서 고기요리를 받아먹었다. 그걸 보고 조카들이 조그마한 손으로 이것저것 삼촌 이거 먹어, 이거 먹어 하고 내미는 것들도
하나씩 받아먹으면서 조금 시끌시끌한 식사시간이 흘러갔다. 입가에 묻은 소스를 닦아주겠다고 벌떡 일어난 막내 형과 누나가 티격태격하고 매형과 막내형의 애인이 한숨을 쉬고,
그 사이에 할머니가 다정하게 냅킨으로 입가를 훔쳐 주셨다.

다시 입 앞에 들이밀어진 해산물을 받아먹으면서 또 잠깐, 떠오른다. 할머니처럼 다정한 손길은 아니었지만 그러나 거칠지도 않았다.

아이람 소령… 란 칭씨와 조금 공방을 주고받는 장면이 끝난 후에 끈적끈적한 손을 보며 곤란하게 서 있었더니 물티슈를 뽑아서 슥슥 닦아줬었다.
그리고 시끌벅적한 주변을 뒤져서 내 매니저를 찾아낸 후 데려가서 씻기라며 등을 떠밀었었지. 입안에 든 해산물을 다 씹어 넘기자 이번에는 새큼달큼한 샐러드를 입가에 대어줘서 또 낼름 받아먹었다.









누나가 가자고 했던 자쿠지는 누나의 새 저택에 꾸며진 곳이었다. 우리 천사가 가끔 와서 이용해주면 기쁠 것 같아서 이렇게 꾸며봤어(하트) 라고 말하는 그곳은
파르테논 신전의 대리석 기둥을 일부러 무너뜨려 쌓은 것 같은 모양새로, 백색 대리석과 넝쿨 모양의 프레임, 아이보리색 리넨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뭉글뭉글 피어오르는 수증기와 백색 일색인 배경이 어우러져 구름 위에 둥둥 떠 있는 기분을 느끼게 했다.


어린 조카들이 대리석을 깎아 만든 미끄럼틀로 달려가고 난 후 장미 꽃잎을 잔뜩 띄운 따뜻한 물에 들어가 앉았다.
할머니 두 분이 양옆에 앉아서 장미향이 듬뿍 베인 물로 얼굴을 닦아주고 젖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주신다.
손을 붙잡고 촬영은 재미있었느냐, 사막이 더워서 힘들지는 않았느냐, 다른 배우들과는 친하게 지내고 있느냐, 사람들은 다 괜찮으냐,
늘 해오던 질문들을 조곤조곤 해 오셔서 열심히 끄덕끄덕 대답을 했다.

할머니들 안 보고 싶었냐고 하셔서 보고 싶었다고 대답했더니 예쁘다고 양 뺨에 키스를 퍼부어주셨다. 누가 더 보고 싶었느냐고 해서 둘 다 라고 대답했더니 우리 손주는 정치도 잘 한다며 소녀처럼 소리 높여 웃으셨다.
할머니들이 집안에서 제일 힘이 셌기 때문에 두 분이 내 곁에 붙어 있을 때는 잘 다가오지 않는 할아버지가 슬그머니 나는 안 보고 싶었느냐고 하셔서
할아버지도 보고 싶었다고 했더니 환하게 껄껄 웃으시며 그럼 그렇지 역시 내 손자야! 라고 했다가 할머니께 물벼락을 맞았다.

조금 떨어진데서 애인과 함께 그 장면을 보고 웃은 작은 형이 촬영장은 어떻더냐고 물어서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자 형이 귀엽다고 외치며 다가오려고 훌쩍 뛰었다가 애인에게 수영복 뒤춤이 잡혀 저지당했다.
그리고 그 앞을 아슬아슬하게 할아버지의 발차기가 스쳐 지나갔다. 아쉽다며 입맛을 다시는 할아버지께 이겼다는 미소를 지어보이는 형의 애인이 대단해 보였다.


“형이 드라마 다 챙겨보고 있는데 그 아얄이라는 고양이 아가씨 역할을 맡은 배우가 페일이랬나? 주근깨가 귀엽던데! 빨간 머리는 역시 매력ㅈ… 아, 아, 에이라! 하지마, 아파!”

“애인을 옆에 두고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댄? 응?”

“헙…….”


물속에서 옆구리를 꼬집힌 형이 몸을 비비꼬며 입을 막고 아픔을 상쇄시키는 동안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이 재밌다고 깔깔 웃으시며 작은 형의 흉을 보신다.
얌전히 고개만 끄덕끄덕 하고 있었더니 형이 상처받은 눈을 해서 조금 외면했다.


“배우들도 다 잘 생겼고, 물론 우리 천사가 제일 예쁘지만, 여배우들도 다 예쁘고 귀엽던데. 아, 물론 우리 단테가 제일 예쁘지만. 좋아하는 사람 안 생겼어?”

“로라라는 아가씨도 참 참하게 생겼던데.”

“로라는 안돼, 그 아가씨 보기보다 나이가 너무 많아. 단테보다 열 살이나 연상이야.”

“그렇게 안 봤는데… 그럼 페일이란 아가씨는 어때? 스무살이고, 주근깨가 아주 매력적인데.”

“맬린다라는 여자아이……는 안 되겠구나, 하하, 하하.”


대체 뭘 말하고자 하는 걸까. 가만히 바라보며 열심히 머리를 굴렸지만 결국은 답이 나오질 않아서 포기했다.
멀뚱히 보고 있자니 아이들이 노는 것을 보다가 온 누나가 웃으면서 ‘네게 좋아하는 여자가 생기지 않았을까 싶어서 저렇게들 말하는 거야’라고 대답해준다.


“그래, 천사야. 혹시……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거나 그러진 않았니?”

“이번에 촬영은 조금 길었고…… 굳이 배우가 아니더라도 스텝이라던가.”

“……?”

“그야 당연히 그 요망한 것을……이 아니라, 그, 그냥 우리 천사가 좋아하는 사람이 누군지 궁금해서 말이다, 하하하하하.”


무서운 기세를 풍기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던 작은 형이 애인의 물속 발차기에 맞고 휘청거리며 다급히 주저앉으면서 말꼬리를 흐렸다.
할머니들과 할아버지, 누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그런 작은 형의 말에 맞장구를 친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내 눈치를 보는 것처럼 어설프게 웃었다.

흐음.

한 쪽으로 기울이고 있던 고개를 반대편으로 갸웃- 했다. 그리고 장미 꽃잎이 둥둥 떠 있는 수면을 바라보며 조금 침묵했다.
가족들이 말한 목록에는 없었지만, 문득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저를 볼 때면 날카로워지는 눈빛, 촬영이 끝나기가 무섭게 어디론가 사라져 얼굴 보기도 힘들고, 저 멀리 발견해서 따라갈라치면 순식간에 휙휙 도망쳐버린다.
이레와 노바로 있을 때는 그렇게 다정하면서. 단테와 애쉬로 돌아오면 차가워져. 크루즈에서도……. 보디가드이자 수행원인 케빈이 내게 쌀쌀맞은 그 남자가 뭐가 좋아서 자꾸 다가가는 거냐고 잔소리 했지만…… 나도 모르겠다.

왜 나는 그를, 애쉬를 자꾸 쫒게 되는 거지? 안 보이면 찾으러 다니고 싶어지고, 보이면 매달리고 싶고.

내가 담배에 약한 걸 알고는 자꾸 달라붙으면 담배연기를 뿜어서 쫒아내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한숨을 쉬며 담배를 든 손을 멀리 놓고 나를 뜯어낸 다음, 도망간다. 도망가. ……내가 그렇게 싫은 건가.

그가 날 싫어하고 있다는 생각을 떠올리자 저절로 눈가에 눈물이 고인다. 코끝이 시큰해지고 자꾸 어딘가가 따끔따끔해져서 뜨거운 자쿠지의 온도가 힘들어졌다.
내가 생각에 잠길 때부터 조용해지던 가족들이 눈에 눈물이 고이자 당황하여 달래는 것에도 눈물은 자꾸자꾸 나왔다.
가까이 다가온 작은 형이 나를 들어 안고 밖으로 나갈까, 몸이 안 좋아? 라고 물어서 그저 고개만 끄덕끄덕했다.
뜨거운 물에서 나와 비치체어에 눕혀지고, 누나가 차가운 음료를 가져와서 조금 마셨다. 걱정스럽게 쓰다듬는 가족들의 손길에도 자꾸만 애쉬 생각이 난다.


나한테 쌀쌀맞고, 나만 보면 도망가는 애쉬도 ……그렇지만 도망을 가지 못할 때는, 내가 쫒아갈 때 걸음 속도를 조금 늦춰준다.
내가 가까이 있을 때는 새로 담배를 꺼내서 피우지 않아. 따라오지 말라고 화를 낼 때도, 내 몸을 밀쳐내는 손은 담배가 들리지 않은 손이다.
대사 외의 말을 거의 하지 않는 내 곤란을 가장 빨리 눈치 채는 것도 애쉬고, 체력적 문제보다는 스트레스에 약한 내 상태를 케빈 보다 먼저 눈치 채는 것은 촬영장에서 그가 유일했다.

애쉬는 차갑다. 그런데 다정해. 자꾸자꾸 도망가고 밀어내면서 왜 그렇게 다정한 거지.







나를 향한 가족들의 절대적인 다정함 외의 다른 호의는 받아본 적이 없다.
그들이 나를 부르는 별명- 헤르난데즈가 보물, 황태자, 자라지 않는 소년…… 말이야 좋아 보일지 모르겠지만 담긴 뜻은 비꼼이 가득하다는 것을 안다.
내가 타고난 것들이 차고 넘치도록 많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나를 질투하고 시기한다는 것도 안다.
순수한 호의로만 나를 대해줄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음도 알고 있다.
재력가의 집안에서 태어나 배우의 길을 걷게 된 것에는 여러 가지 복잡한 사정이 있었다.
몸값을 노린 수많은 납치 시도, 실제로 당했던 납치, 몹쓸 짓을 당할 뻔했던 일들. 아주 어렸을 때의 일이지만 바로 어제 일어난 일인 것 마냥 생생하게 기억한다.


네 가족 외에는 널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잖아, 이렇게 예쁘니 집안에서 마냥 싸고돌지, 돈을 노린 게 아니었으면 나도 너라는 게 있는지 몰랐을 거야.
경찰이 너를 찾고 있군. 네가 부잣집 아들이 아니었어도 그랬을까? 네가 금발에 녹안을 가지고 있지 않았더라도 그들이 너를 이렇게 찾고 있었을까?


낄낄거리며 냉소하던 한 납치범의 입에서 나왔던 말들은 내 삶을 완전히 비틀어 놓았다.
내게는 헤르난데즈가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주어졌던 삶의 플랜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몇 대를 이어온 재벌가, 명문가라고 부를 수 있는 수준이 되어버린 집안은 아무리 예뻐하는 아이라 할지라도 어릴 때부터 엄격한 교육을 받고 자라게 한다.
가문에서 정해준 순서로 가문에서 필요한 공부를 하고, 가문에서 원하는 미래를 살아가야한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그냥 비틀렸다고 밖에는 설명할 말이 없다. 가족들은, 가문은 나를 노출시키기로 결정했다.

가장 밝은 곳에서 가장 많은 눈이 지켜보게끔, 그 누구도 그 눈을 피해 내게 해를 끼칠 수 없게끔 만들고자 했다. 그래서 지금의 내가 만들어졌다.
모든 사람들이 나를 보고 있지만 아무도 손 댈 수 없는 헤르난데즈의 보물.

일과 공부는 철저하게 한다. 사람과의 교류는 그 두 가지에 필요한 것이 아니면 일절 하지 않았다. 틈을 보일 수 없었다.

대중의 눈앞이 아닐 때에는 수행원들의, 그들의 눈앞이 아닐 때에는 가족들의. 안전한 집안에서 잠이 들 때에도 기계의 눈이 항상 나를 지켜보고 있다.



지켜봐지지 않고 있는 느낌은 모른다. 몰랐다. 언제나 누군가가, 무엇인가가 나를 지켜보고 있기 때문에 시선이 느껴지지 않는 상태 같은 건, 몰랐다. ……몰랐다.



카테라의 촬영이 시작되고, 벌써 몇 회분의 방송이 나갔을 때쯤이었다. 그날의 촬영은 별 것 없었다. 모처럼 만의 느긋한 일상 신을 찍는 날이었다. ‘이레’는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고양이를 잡으러 깔깔거리며 사막의 거리를 뛰어다니고, ‘노바’는 ‘할아버지’와 젊고 예쁜 아가씨의 구두 수선비를 깎아주는 문제로 티격태격하는, 그런 장면.
‘의뢰자의 고양이’는 유도당한 대로 노바네 수선가게 앞을 지나 달려가고, 이레는 그 뒤를 쫓아가다 노바와 할아버지에게 인사를 하며 스쳐 지나가기만 하면 되었다.


-이것 봐, 또 장부가 안 맞잖아! 이 구두 맡긴 사람 예쁜 여자지, 그렇지?!

-내가 내 수선비 깎아주는 것 가지고 왜 너한테 잔소리를 들어야 하냐 손자놈아!

-할배가 자꾸 그러니까 가죽집에 대금 치르는게 늦어지잖아!

-아하하, 오늘도 노바한테 혼나고 계시네요, 할아버지!

-앗, 이레! 이것 봐, 아주 나쁜 녀석이야! 손자놈이 할아버지한테 바락바락 대들고!

-이 할배가……!


이어서 대본대로 노바는 할아버지의 시가 상자를 압수해서 이걸로 잔금 치르고 올거야! 라며 머리위로 번쩍 들어 올리고, 자그마한 키의 할아버지가 폴짝폴짝 뛰어서 잡으려고 애쓰고……
이레는 그런 그들에게 고양이 잡아다 주고 난 다음 다시 놀러온다며 스쳐 지나가고. 그냥 거기에서 끝낼 수 있는, 별다른 예행연습이 없어도 한 번에 오케이 사인이 떨어질 수 있는 그런 편하고 단순한 장면이었다. 그런데……

조손을 지나쳐서 고양이의 뒤를 쫓아 달리다가 갑자기, 멈췄다. 왜 멈췄는지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그냥 가만히 멈춰 서 있었다.

감독님과 스텝들이 웅성거리고, 케빈이 급히 달려와 내 상태를 살폈다. 어디가 아프냐, 뭐가 잘못 되었느냐 계속해서 질문을 던지는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내가 조금 이상하다는 것을 느낀 케빈은 잠시 쉬어도 되겠느냐고 감독님께 양해를 구했고, 멍하니 멈춰선 나를 들어 안아 쉴 자리로 옮겨 주었다.
그러나 가던 도중, 갑자기 멈췄던 것과 마찬가지로 나는 또 갑자기 움직일 수 있게 되어서 다른 사람들의 걱정 속에서 다시 그 장면을 연기했다.
이번에는 지정된 장소까지 달려가는 데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어서 그냥 몸이 좋지 않았나보다 하고 넘어갔다.


그리고 그 뒤로- 몇 번을 더, 그런 일을 겪었다. 그냥 갑자기 촬영 중에 몸이 멈추고, 연기를 하지 않고 있는 평소처럼 입을 꾹 다물어버린다.
한 번도 촬영 중에 말썽을 부린 적이 없는 내가 자꾸 맥을 끊어놓자 감독님도 스텝들도 배우들도 곤혹스러워 했지만 가장 곤란했던 건 나였다.
지금은 일 하는 중인데, 그런데 그냥 몸이 멈춰버려. 이상해. 이상해. 정말 이상했다. 이런 일은 겪어 본 적 없어. 아냐, 알고 있는 것 같기도 해. 뭐지? 왜지?

……어디서?

이유를 알게 된 것은 슬슬 감독님의 인내심이 바닥이 난 것 같다고 생각할 때쯤이었다.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무는 것은 오직…… 집에서. 집에서 뿐이다. 헤르난데즈가의 저택, 아니면 큰형의 집, 다른 가족들이 집과 그들의 시선 아래 있을 때 뿐. 긴장감이 풀어져버릴 때 뿐.
그렇다면 왜 긴장감이 풀어지는 거지? 왜냐하면 가족들의 품 안이니까, 그래도 되는 곳이니까, 타인의 시선이 느껴지지 않는 곳이니까. 그런데 여기는 촬영장이야, 모두들 지켜보고 있고 카메라도 돌아가고 있다.
그런데 왜 나는 그런 촬영의 한 가운데에서 갑자기 타인의 시선이 사라져버렸다고 느낀 걸까. 왜일까.

……이유를 알게 된 것은 그 순간.

이유를 고민하며 잠시 멍하게 서 있던 사이, 사라졌던 긴장감이 순간적으로 확 되살아났다. 그리고 느껴지는 타인들의 시선과 무기물의 시선. 그저 의미 없이, 내게 던져지는 시선들을 따라 고개를 휙 돌리다가 눈이 마주쳤다.
노바의 분장을 하고 있어서 새파랗게 빛나고 있는 애쉬의 눈. 그의 시선. 찌푸려진 미간과 좋지 않은 감정이 담긴 매서운 눈매의 그 눈.
그리고 나를 보고 있던 그는 눈이 마주치자 곧장 불쾌감을 표시하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아예 몸도 같이 돌려 그 자리를 피했다.

그래서 알게 되었다. 그의 시선 때문이었구나. 보고 있다가, 사라지면, 그렇게 되는 거였구나.
그가 내게 행사하는 영향력은 단순히 그 시선을 벗어난 것만으로도 다른 모든 것들이 주는 긴장감을 풀어버릴 정도구나.  


이상했다. 신기했다.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아예 그와 함께하지 않는 촬영은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문제가 생기는 것은 같이 연기하다가 그의 턴이 끝나고 아직 내 분량이 남아있을 때, 그가 나를 피해 시선을 돌릴 때였다.
내가 그것을 의식하고 난 이후부터는 조금 더 민감해져서, 나는 드디어 남들이(애쉬가) 나를 보고 있는 시선이라는 것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나를 보는 시선을 느낄 수 있게 되자 나를 보지 않고 있는 시선도 덩달아 자연히 알게 되었다.

그는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 딱히 싫어하지도 않았다. 다만 날 불편해하고, 그다지 엮이고 싶지 않아한다.
솔직히 배우로서 그의 태도는 결코 좋다고 말할 수 없었지만 나는 그의 그런 태도가 썩 달갑게 느껴졌다.
나를 불편해하는 마음이 그 시선에서 몸짓에서 여과 없이 흘러나온다.

솔직해. 그대로 와 닿아. 종류가 어떻든 간에 그의 불편해하는 모습에는 일점의 가식도 존재하지 않아.


그래서 기뻤다. 모두가 나를 보고 있을 때, 너는 나를 보고 있지 않아서.
수없이 많은 시선들 틈에서 너만 나를 외면하고 있어서.


네가 나를 보지 않고 있을 때 나는 타인의 시야에서 벗어나는 감각을 맛봐. 내가 비틀려버렸던 그날 이후로는 느껴보지 못했던 그 감각을, 나를 꺼려하는 너를 통해서 느낄 수 있다.
그것이 매우 기껍다. 다른 배우들이 나를 대하는 태도는 호감, 혹은 무관심. 그러나 애쉬는 호감을 표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관심이 없지도 않고, 싫어하지도 않으면서 좋아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고.
그 미묘한 단차가… 아주 미묘한 단차가 나는 좋았다.


일부러 그의 시선을 좇았다. 졸졸 따라다니며 나를 외면하려 애쓰는 그 모습을 보며 즐거웠다.
나를 향하는 감정을 한 장의 필터도 거치지 않은 채 분출하는 그 모습이 좋아서 그가 짜증을 내며 나를 괴롭히거나 대놓고 화를 낼 때에도 그저 졸졸 따라다니기만 했다.

나를 외면하는 그 순간이 좋아서, …외면하기 전에 나에게 닿는 그 시선이 좋아서.









“……댄.”

“천사야, 어디가 안 좋아? 응? 닥터 요한을 부를까?”

“…….”

“……일단은 방에 들어가서 좀 눕자. 마리, 가운 좀 가져다주겠어?”

“여기 수건. 물기부터 닦아.”


진짜 몸이 좋지 않은 건지 조금, 눈앞이 흐리고 소리가 울린다.
흐릿한 수증기, 걱정스러운 가족들의 얼굴.

형의 등에 업혀 옮겨지면서 깜박깜박 느리게 열렸다 닫히는 눈꺼풀 안으로 나를 외면하는 그의 모습이 흐리게 비친다.


“……애쉬…….”

“천사야?”

“…….”


모두가 보고 있는 나를 보지 말아줘. 나를 외면해. 좋아하지 않아도 괜찮아. 불편해 해도 좋아.


“열이 조금 오르는 것 같은데, 닥터를 불러야겠어.”

“크루즈 여행에 보내지 말고 푹 쉬게 두었어야 하는 거였는데!”

“빌어먹을 케빈놈은 대체 뭘 한 거야?! 윌리엄!! 윌리엄!! 케빈을 불러!”

“아가, 조금만 기다리면 곧 닥터가 도착할 거야. 조금만 더 깨있자, 응?”


그리고, 그리고 나를 봐줘. 모두가 보지 못하는 나를, 봐줘. 나를 외면하고, 나를 봐.

애쉬, 너라면, 너는, ……….



나를 피하고 있어? 나를 외면하고 있어? 괜찮아, 괜찮아. 고마워.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