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로 좋지 못한 꿈을 꾸었다. 기억하고 싶지 않지만 지울 수 없는 ‘그때’의 꿈이었다. 무섭고 괴롭지만 더 이상 울고 비명 지를 기력도 남아있지 않은 그런 꿈.
그저 담담히 눈앞에서 벌어지는 참상을 지켜보기만 했다. 내게 일어났던 일도, 그리고 그것을 위해 죽어가던 다른 아이들에게 닥쳤던 일도.
끔찍해.
잠에서 깨어나며 온 몸을 진저리친다. 등이 아파. 여러 차례의 수술과 성형으로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은 등이, 아프다. 바로 누울 수도 없어 헐떡거리며 엎드려 꿈틀거리는 사이 케빈과 유모가 달려와 나를 추스른다. 아파. 뻐끔뻐끔, 그러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등에 뭔가 있는 것 같아. 떼어내야 해. 뜯어내야한다. 케빈, 손, 손을 놔줘. 유모, 등이 아파. 뜯어줘, 없애줘.
그러나 케빈은 날 놔주지 않고 유모는 그것을 떼 주지 않는다. 왜? 왜 안 떼 주는 거야? 내가 아무리 울어도 둘은 날 잡고 놔주지 않을 뿐 다른 것은 해주지 않았고, 그리고 아마 닥터 요한이 방에 들어왔던가. 그를 보고 안심했다. 응, 그가 이것을 뜯어내줄 테니까. 가만히, 얌전히 기다리면 없애줄 거야. 헐떡이며 그의 손을 좇았다. 주사바늘이 약물을 내게 연결된 튜브에 주입하고, 그리고 조금 시간이 지나니 편안해졌다. 자꾸 졸리다. 케빈이 꽉 끌어안고 있던 내 몸을 다시 천천히 침대위에 내려준다. 유모가 따뜻한 손으로 뺨을 쓸어주고 가슴을 토닥거려줘서 기분이 좀 더 나아졌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주변이 어두웠다. 부스스 몸을 일으키니 방 한쪽에서 케빈이 득달같이 달려와서 부축해준다. 아니, 유모였나? 유모……아냐, 이건 케빈이다. 유모의 손은 조금 더 부드러워.
“괜찮아, 천사님?”
“…….”
“……기분은 좀 어때?”
케빈이 가져다준 물을 마시고 침대를 벗어났다. 다리가 조금 후들거리지만 걸을만하다-고 생각했다. 씻고 싶어. 땀에 젖은 몸이 불쾌하다. 머리가 멍해서 생각이 잘 이어지지 않았다. 팔에 뭔가 감기는 것이 있어 조금 흔들자 케빈이 내 팔을 붙잡고 그것을 떼어낸다.
“씻어야겠네, 유모를 부를게. 욕실에 데려다 줄 테니까-.”
“…….”
“잠시만, ……왜, 그냥 걸을래? 응, 알겠어, 자….”
케빈의 손이 등에 닿자 기분이 확 나빠졌다
왜일까-… 또, 그때의 꿈을 꾸었던가. 속이 울렁거려. 비틀비틀 걸어 방에 딸린 욕실에 들어갔다. 등에…… 있었던가? 있나? 뜯어냈던 것 같은데. 응, 없어 이젠. 그래, 없지…… 응.
유모의 도움을 받아 몸을 씻고 나오자 기분이 많이 나아졌다. 그러나 여전히 머릿속은 몽롱해서 그녀가 뭔가 말하는 걸 듣지 못했다. 자꾸 늘어져. 낯선 감각은 아니다.
슬슬 한계가 올 때가 되기도 했지……. -뭐가… 무슨 한계……? 이상해, 뭔가 조금, 생각이, …….
깜박깜박 멍하게 눈만 깜박이고 있는데 불쑥, 눈앞에 뭔가가 들이밀어진다. 조금 놀랐다.
왠지 목을 가누기가 힘들다. 어지럽고, 울렁거리고, 시야가 자꾸 점멸하듯 깜박여서 눈을 뜨고 있기가 힘들었다. 유모? 유모의 손? 내 손을 잡아서 알 수 없는 덩어리 위에 얹어주는 손. 그리고 느껴지는 것은 부드럽고 촉촉한 질감의 작은 것들.
잠시 어지러운 머리를 붙잡고 간신히 떠올렸다. 나는 이 감촉을 알아, 이건 꽃이야. 꽃잎의 느낌이다. 차갑지만 싸늘하지 않고 부드러우면서 촉촉한. 뭘까…… 힘겹게 초점을 맞추어 들여다보니 푸른색이 아름답게 번진 수국이었다.
“천사님, 듣고 있어? 이거 애쉬 밀러가 천사님 준다고 들고 온 거야.”
…애쉬……?
“……?”
“애쉬, 밀러. 애쉬. 천사님이랑 같이 연기하는 배우 있잖아, 노바말야.”
“…….”
애쉬.
“그래, 이거 천사님 주려고 밀러가 들고 왔어. 애쉬가 단테에게. 잘 봐. 색이 굉장히 예쁘게 들었어.”
애쉬가, 단테에게……?
순간 멍하던 머릿속이 맑게 개였다. 눈을 끔벅거리며 잠시 눈앞의 꽃을 들여다봤다.
애쉬가 왜 내게 꽃을 선물한 거지? 보들보들한 꽃잎을 가만가만 손끝으로 쓸어보며 꽃다발을 들고 서있는 애쉬를, 그것도 내게 선물하기 위한 꽃을 들고 있는 그를 상상해보았다. 이상하다는 느낌일까……. 안 어울리는 것은 아니야, 그런데 또 어울리는 것도 아니다. 다른 이를 위한 꽃이라면 모를까 날 꺼려하는 그가 왜……?
“단테 네가 삼일이나 잠들어있어서 걱정했단다. 친한 사람이 병문안을 와주면 좋을 것 같아서 케빈에게 물었더니 밀러씨와 가깝게 지냈다고 하더구나.”
……가까워? 내가, 그와? 고개를 돌려 케빈을 올려다봤다. 곤란한 표정을 하고 시선을 피하는 그의 얼굴이 묘하게 울긋불긋하다. 가만히 쳐다보고 있으니 점점 더 뻣뻣하게 굳어지며 조금씩 몸을 뒤로 물린다.
그러나 나는 그를 다루는 방법을 알아. 힘없는 팔을 조금만 뻗으면, 응, 지금처럼 그는 재빠르게 다가와 내 손을 잡아준다. 그리고 한 번 내 손에 잡히면 먼저 놔주기 전까지 그는 꼼짝없이 잡혀 있곤 했다.
입술이 조금 찢어지고 뺨에 생채기가 나있다. 아마도 작은 형의 작품인 것 같아 미안한 시선을 보내니 자기도 한 대 때렸으니 괜찮다며 웃어 보인다. 우수한 보디가드이자 수행원인 케빈은 막내 형과 친구이기도 해서 가끔가다 내 신변 문제로 주먹다짐을 하곤 했다. 다른 이들이었다면 있을 수 없는-고용인과 주인이 주먹다짐을 하는- 일이었지만 케빈은 특별하니까.
톡톡 생채기 아래를 두드리니 똑같은 곳을 때려주었다고 대답해준다.
“어제 오후 늦게 짐 싸서 들어왔어. 당분간은 저택에 머물기로 했으니까 매일 볼 수 있을 거야.”
굳이 부연설명을 듣지 않아도 충분히 그 과정이 예상되어서 당장 애쉬가 근처에 있다는 것이 기쁘기보다는 미안했다. 그와 가까워지고 싶지만 이런 식은 좋지 않은데. 아마 그는 내가 더 싫어졌겠지. 이제는 진짜로 ‘싫다’는 감정에 가까워졌을 거야. 그렇다면 어쩌지.
눈가에 열이 올라서 뜨겁다. 케빈의 손을 놓고 눈을 비비니 그가 안절부절 못하며 손을 잡아내려 그러지 못하게 한다. 유모가 따뜻한 손으로 양 뺨을 잡고 조금 들어 올려서 그녀와 눈을 마주치게 만들었다.
“마리아의 독단이긴 했지만 아가, 나는 그 결정이 너와 그 사이의 관계를 개선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단다.
비록 강제로 불러들여 묶어둔 셈이지만 더 이상 손은 대지 않기로 다들 이야기를 끝냈어. 일단 가까운 곳에서 매일 얼굴을 보고 지내다 보면 어떤 방식으로든 상황은 변해가게 되어 있으니까.”
그럴까? 정말로 애쉬와 좀 더 가까워질 수 있을까? 그러나 어떻게? 그는 나를 좋아하지 않는데.
유모의 손이 내 뺨을 쓰다듬어서 조금 고개를 기울여 기댔다. 인자한 노부인은 그저 웃으며 특별히 어려운 일은 없을 거라고, 그저 인내심을 가지면 될 일이라고 말해온다. 그리고 인내심은 그 행동력과 더불어 헤르난데즈의 천성이니까. 정말로 별 일 아니라는 듯한 그녀의 목소리에 안정을 되찾았다.
“조금 전에 밀러씨가 집으로 돌아왔어. 운동을 하는 것 같던데, 곧 끝날 것 같으니 가보겠니?”
애쉬가 집에 와있다는 소리에 두근두근, 가슴이 가볍게 두근거린다. 걱정스럽지만 유모의 격려에 천천히 일어나 그를 보러 가기로 했다.
나를 보면 분명 인상을…… 인상을 찌푸리겠지만……. 그래도 눈이 마주치는 건 좋으니까.
언제나 바로 봐주고 있으니까, 이번에도 눈을 마주쳐주겠지. 들뜬 마음이 걱정스러움을 뒤로 밀어 눌렀다.
방문을 열고 복도에 나가기 전, 그래도 한참을 머뭇거리게 된다. 손잡이를 잡고 문을 열기까지는 한참의 시간이 필요했고, 또 주저하며 뒤를 돌아다보니 유모와 케빈이 파이팅 포즈를 취해서 간신히 복도에 발끝을 내밀어 발을 닿는다.
한 발을 내딛으니 다음은 쉽다. 몸을 완전히 내밀고 몇 걸음 더 걸어 애쉬가 머문다는 방에 조금 가까워졌을 때다.
갑자기 발자국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방문이 벌컥 열리고, 안에서 검은 그림자가 불쑥 튀어나온다. 애쉬라는 예상은 충분히 할 수 있었지만 빛을 등지고 있는 바람에 검게 가려져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런 내 기척을 느낀 건지 그가 나를 돌아봤다.
아, 눈이 마주쳤어.
나를 직시하는 그의 눈동자에 기분이 확 좋아져서, 평소에 하던 것처럼 냉큼 달려가 그에게 매달렸다. 좋은 냄새가 나는 것 같아. 순간적으로 그에게 안기며 느낀 향기는 자신이 쓰는 바디클렌저와 같은 것이었다. 씻고 나온 거구나.
그러나 그를 끌어안느라 기울어진 몸의 균형을 바로 잡을 세도 없이 곧바로 거칠게 밀쳐졌다.
코끝을 스쳤던 향기는 말 그대로 스치고 지나갔을 뿐으로, 밀쳐짐에 놀라 든 고개에 마주친 그의 눈은 참을 수 없는 노기가 가득 차 있어서.
역시 내가 정말로 싫어진 거구나. 정말로, 싫어진 거야.
순간적으로 눈앞이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아마 케빈이 달려 나와 부축해주지 않았더라면 정말로 그 자리에 주저앉았겠지.
등에 닿는 손이 싫어서 끌어안으려는 그의 손을 밀어내고 그저 팔만을 잡아 몸을 기댔다. 방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더 이상 두 다리로 몸을 지탱할 수가 없어서 자리에 주저앉았다.
뒤에서 쾅 하고, 거세게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린다.
“천사님 괜찮아? 안 다쳤어? 인정사정없이 밀쳐내던데.”
아냐, 그렇게 밀쳐내면서도 애쉬는 내 몸에 그의 손톱이 닿게 하지 않아.
고개를 저어 괜찮다하니 한숨을 내쉰 케빈이 양 팔 아래로 손을 넣어 몸을 일으켰다. 걸음마를 처음 떼는 아이처럼 그에게 들려 침대에 옮겨지고, 그리고…… 맑아졌던 것이 무색하게 다시 눈앞이 흐려진다.
자꾸만 뒤섞이는 주변의 목소리, 그리고 공기가 울리는 소리에 범벅이 되어 애쉬의 화난 눈동자가 아른거렸다. 이전까지 그는 이렇게 화가 난 눈으로 날 본 적이 없는데. 그저 짜증이 치밀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그런 눈빛이었을 뿐이었는데 이제는 정말로 내가 싫어져 버린 걸까. 정말로? 더 이상 꼴도 보기 싫을까? 더 이상 날 봐주지 않는 걸까?
“아가, 쉬- 쉬, 괜찮다, 괜찮아. 그저 그는 우리가 독단적으로 저지른 일에 대해 화가 난 것 뿐이야. 네게 화가 난 것이 아니란다. 아가, 단테, 여길 보렴. 응? 내니를 봐.”
“…….”
“아가, 숨 쉬어야지, 응? 쉬이- 쉬, 괜찮아, 천사야? 생각은 그만 하고 여길 보렴. 내가 누구지? 응?”
내니.
간신히 초점이 맞아 걱정스러운 눈으로 들여다보는 유모와 눈이 마주쳤다. 그러나 힘들어…… 자꾸만 눈앞이 흐려지고 머리가 어지러워져서 유모가 말을 거는데 알아들을 수가 없어.
유모, 유모, 뭐라고 하는지 들리지 않아, 애쉬가… 애쉬가 날 싫어해. 화를 냈어. 더 이상은 날 봐주지도 않을 거야. 나를 봐주는 사람이 없어져, 그럼 나는? 나는 어디에 있어?
답답하고 힘들다. 뭔가 이상해. 아까부터 들리는 거슬리는 쇳소리는 어디서- 내 목에서 나는 건가.
“옳지, 옳지, 천천히- 천천히. 아가, 애쉬 밀러는 네게 화를 낸 게 아니야. 우리가 멋대로 여기에 머물게 해서 그런 거야. 너를 밀어낸 것도 그저 조금 놀라서 그랬을 뿐이니까. 아가, 천사야, 내 말 들리니? 응?”
정말이야? 정말 그런 걸까? 정말로, 내게 화를 낸 것이 아니야?
케빈이 입가에 무언가를 갖다 대주고 나서 숨 쉬는 것이 조금 편해졌다. 유모가 계속해서 반복하는 말을 듣고 있으니 아프도록 뛰던 심장도 차분해져서 조금은, 멍하던 머리가 다시 개어간다.
애쉬는 내게 화를 낸 것이 아니야. 나 때문에, 내가 그를 화나게 한 게 아니야. 애쉬는 화를 내지 않았어. 그저 그는 조금 놀랐을 뿐이니까, 그러니까 괜찮아. 괜찮아.
가슴께를 다독이며 유모가 하는 말을 속으로 따라 되뇌인다. 계속 따라하다 보니 통증도 가라앉고,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애쉬.
그를,
그가…… 그가 내 옆방에 머물러.
“……밀러를 만나면 반갑게 인사하고, 방긋 웃는 얼굴로 맞이해주렴. 낯선 곳에 머물게 돼서 조금 불안할거야.”
응, 애쉬를 보면, 인사해. 웃으면서. 우리 집은 크니까 처음 온 사람에게는 낯설 수밖에 없어. 그래도 나와는 안면이 있으니까, 다른 사람들 보다는 내가 편하겠지. 그러니까 평소처럼 그를 대해야해.
“시간이 많이 늦었으니 지금은 좀 더 자고 내일 애쉬를 만나면 밝게 웃어주는 거야. 알겠지?”
토닥토닥, 가슴을 부드럽게 토닥이는 유모의 손길에 조금씩 눈꺼풀이 감긴다. 졸려.
지금은 잘 시간이니까 보러 가는 건 실례야. 그러니까 날이 밝으면 만나서 인사를 해야지. 평소처럼. 그럼 애쉬도 평소처럼 조금 꺼림칙한 눈빛으로 나와 마주 봐주겠지.
밀어내겠지만 여전히 상냥할 거야. 내게 진짜로 화를 내지는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런데 멋대로 집에 초대해버려서 조금쯤은 화를 낼지도 몰라.
그래도 괜찮아, 나도 누군가가 강제로 어딘가에 데리고 가면…… 데리고…… 가면.
서서히 검게 변하는 머릿속에 순간 무언가가 푸드득,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새의 날갯짓 소리와 비슷해. 그리고 스쳐지나가는 것은 하얀…… 하얀 덩어리. 뭔가. 깃털이 흩날리는 것 같아. 깃털, 새, 새의 날개, 날개,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
“……잠들었지?”
“응, 그런 것 같아요. 호흡기는 떼도 괜찮을까.”
“닥터를 호출했으니 곧 오시겠지. 그가 조취를 취해줄 거야. 그때까진 그냥 두자.”
식은땀을 흘리며 희게 질린 모습에서 별로 편하게 잠들었다는 느낌은 받을 수 없었지만 그래도 일단은 의식불명 상태가 아닌, 잠들어있는 상태라는 것이 중요했다. 지난 며칠간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것에 얼마나 놀랐던가.
예전 언젠가, 몇 주 씩이나 깨어나지 않아서 건강상의 문제란 핑계를 대고 영화에서 하차했던 때의 악몽이 다시 떠오르는 기분이었다.
그 난리 이후 단테의 연약하고 병약한 천사 이미지는 더욱 확고해져버렸으나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주변에서 깨질까싶어 조심스러운 모습을 보여주는 것에 식구들은 더 안심하기도 했다.
다만 걱정되는 것은 단테 본인이 무엇을 겪고 있느냐 하는 것.
예전에 그렇게 의식이 없을 때 대체 그 안에서 무엇을 보고 있었던 것인지, 깨어난 단테는 한동안 심각한 신경쇠약에 시달렸었다. 잠도 자지 않으려 하고, 다른 이들과 몸이 닿는 것은 물론 눈 안에 담는 것조차 거부했다.
그저 한없이 불안해하며 몸을 웅크리고 덜덜 떨고만 있었을 뿐으로 가끔은 정말로 혼이라도 나가버린 얼굴로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기도 했다. 그리고 식구들은 경찰 조사 보고서를 통해서야 알게 되었던 어린 희생자들 몇몇의 이름을 중얼거리기도 했었다. 연기할 때를 제외하고는 입 밖으로 작은 소리 한 번 내는 것을 본 적이 없었는데 그때의 단테는 ……다시는 그런 상태로 그리 중얼거리는 가슴 아픈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그나저나 참 모멸 차게 밀어내던데.”
“그래, 마리에게서 쉬운 성격이 아니라는 말은 전해 들었지만…….”
“촬영장에서도 별로 친절하지 않아요. 연기자라면서 무슨 대외적인 모습 같은 건 신경도 안 쓰는 건지, 연기자들이고 스텝들이고 전부다 애쉬 밀러는 단테 헤르난데즈를 좋아하지 않는다! 라고 수군거린다니까. 또 그렇게 밀어내는 대도 졸졸 따라다니는 단테보고 바보 같다는 놈들도 있었고.”
“…….”
“아 물론 훌륭하게 처리했으니 그렇게 인상 쓰지 말아요 캐서린, 아 진짜라니까. 댄한테 이야기해서 확실하게 혼구멍을 내줬으니까.”
잔뜩 찌푸려졌던 유모의 미간이 스르륵 펴지고 케빈의 입에서 과장된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 덕분에 유모의 손에 꼬집힌 옆구리를 슬슬 문지르며 씻고 나온 것이 무색하게 땀에 젖은 단테의 앞머리를 살살 넘겨준다.
“캐서린, 지금 우리 천사님…… 상태 조금 이상한 거 맞죠.”
“응……. 썩 좋은 상태는 아닌 것 같다. 쉬어줘야 할 때를 넘겨도 한참 넘겨버려서 더 그런 것 같아. 이번엔 외부 촬영도 꽤 길었고…….”
“오늘 일은 기억 못 할 것 같았어요, 아까 반응은…….”
“아마도 오늘은 밤이 늦어서 밀러를 만나지 못했다고 생각할거야. 그러니까 단테가 혼란을 느끼지 않도록 조금 주의해주자꾸나.”
“……진짜 저놈 얄미워. 한 대 확 때려주고 싶은데.”
“그건 댄과 주인어른께 맡겨두고 너는 얌전히 단테나 잘 보살피도록 해. 너까지 나서면 꼴이 우스워진다.”
“그걸 아니까 얌전히 있는 거잖습니까.”
착한 아이로구나, 툭툭 등을 두들기는 것에 케빈이 옅은 한숨을 내어쉰다. 우리 천사님은, 진짜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 같은 이 아이는 모든 것이 너무 어렵다. 언제쯤 네가 편안해질 수 있을까, 언제쯤 네가 그 과거를 떨쳐내고 바로 설 수 있을까.
섬세하기가 유리세공품과도 같은 이 아이를 대하기가 귀찮아서 그런 것을 바라는 건 아니었다.
그저 남들처럼 웃고 남들처럼 느끼고 남들처럼 표현하고. 다른 평범한 사람들처럼 지낼 수 있기를 바랄 뿐인데 그것이 이리도 어렵다.
한 번 무너져 내린 정신은 다시 되돌릴 수 없다고들 이야기 하지만 그래도 여기저기 버팀목을 대어주다 보면 어떻게든 일어설 수 있지 않을까.
무너진 채로 있어도 뭐라 할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그래도…… 그래도 바로 선 모습을 보고 싶은 것은 어쩔 수 없는 욕심이다. 우리는 이 아이가 가장 아름답게 웃고 있을 때를 기억하니까. 행복하게 미소 지으며 뛰어다니던 그때를 기억하고 있으니까, 욕심이 나는 것은 어쩔 수 없어.
그래서 애쉬 밀러에게 기대하게 된다. 지금까지 단테가 이런 식으로 매달리고 관심을 표하는 사람은 달리 만나본 기억이 없다. 어쩌면 지금까지의 모든 버팀목들 중에서 가장 크고 튼튼한 것이 되어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생기는 것도 어쩔 수 없다.
다만 그의 성격이 워낙 ……쉽지 않은 데다 헤르난데즈의 성정 또한 만만치가 않으니 부딪히게 되는 것일 뿐.
다음날 깨어난 단테는 유모의 예상대로 전날 밤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다만 애쉬밀러에 집중하여 그와 마주치면 방긋방긋 웃으며 쪼르르 가서 매달렸다가 내쳐지길 반복했을 뿐이었다.
잠에서 깨어나면 조금은 깨끗한 정신으로, 애쉬를 만나기 전까지는 어떻게든 버티고 있다가 그와 만나서 매달리고, 밀려난 다음 기절하듯 잠들었다.
안 보는 척 하면서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는 가족들은 애가 타서 단테를 밀어내는 애쉬에게 이를 득득 갈았지만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가는 일만은 벌어지지 않았다.
다만 여기저기에 화풀이를 하고 다녔던 탓에 그들의 뒤를 따라다니는 수행원들만 몇 배로 고생을 해야 했다.
그리고 며칠이나 지났을까, 술을 마시고 늦게 귀가한 날 밤, 드디어 애쉬가 매달리는 단테를 그저 못 본 척 하고 밀쳐내지 않았던 그날.
가족들은 뭔가 대단한 것을 길들인 기분이 들어서 달콤한 와인으로 가벼운 축배까지 들었다. 고용인들도 매우 즐거워하여 그가 먹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면서도 다음날 애쉬의 식단에는 꽤나 공들인 메뉴가 몇 가지나 추가되었었다. 그의 방에 갈아준 시트도 부러 햇빛에 한 번 더 내다 말리고, 그가 외출하면 닦아놓는 운동기구들도 더욱 공들여 반질반질 윤이 나도록 닦아두었다.
한 번 그렇게 단테가 매달리는 대로 받아준 이후로 상황은 유하게 풀려가는 듯했다. 단테는 애쉬가 눈에 보이면 냉큼 달려가 답삭 매달려 그 팔에 뺨을 몇 번 부비고 천천히 떨어져 방긋 웃어 보인다.
그리고 단테의 미소와 마주한 애쉬는 별다른 반응 없이 몸을 돌려 갈 길을 간다.
그 뒤에 방으로 돌아온 단테가 주저앉아버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적어도 다른 사람들의 눈으로 보기에 그들 사이의 공기가 날카롭지 않다는 것이 중요했다.
식구들의 입장에서 단테의 상태가 썩 좋지 않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장기 촬영을 갔다 온 단테는 몇날 며칠을 죽을 듯이 앓다가 다음 며칠은 백치처럼 보내고, 또 며칠이 더 지나야 간신히 조금씩 정신을 차리곤 했었다.
유난히 텀이 길었던 이번의 촬영 이후 촬영팀과 함께 오랜 시간 여행까지 다녀왔으니 상태가 더욱 좋지 않은 것에 대해서도 걱정만을 할 뿐 상황 자체를 이상하게 여기진 않았다.
애쉬와의 신경전까지 겹쳤으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완전한 외부인인 애쉬 쪽에서 단테의 상태가 좋지 않은 것을 이상하게 여기리라는 것은 가족들 중 누구도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던 문제였다.
애쉬가 저를 더 이상 밀어내지 않으니 잔뜩 긴장해있던 단테의 정신력도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가 자신을 밀어내지 않고 그저 받아주는 것에서 미움 받지 않았다는 확신이 서자 그를 향해 줄곧 곤두세우고 있던 신경이 가라앉고, 그리고 긴장의 끈이 느슨해지니 조금씩…… 정신이 흐려지는 시간이 길어지기 시작했다.
눈을 뜨고 앞을 바라보고 있지만 그 속에서는 무엇을 보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상태, 제대로 생각은 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한없이 고통스러운 기억만을 계속해서 되풀이해서 보고 있는지 겉으로는 전혀 알 수 없는 백치와도 같은 시간이 조금씩 조금씩 길어져간다.
걱정스럽게 바라보지만 주변에서 어떻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시간이 지나서 상태가 나아지기만을 바랄 뿐, 잠들지도 못하고 정신을 놓고 있는 그를 안타깝게 지켜보고만 있었다.
상황이 좋지 않게 변해간 것은 방 안에 있던 단테를 햇볕이라도 좀 쪼이게끔 케빈이 안아다 수국정원에 앉혀줬던 날 이후부터였다. 웬일로 평소와 다르게 늦은 시각 외출하던 애쉬가 하필 정신을 놓은 단테와 마주쳤던 것이다.
뭐라도 조금 먹일 생각으로 자리를 비웠다 돌아오던 유모가 목격한 것은 다급히 다가와 단테의 시선을 잡아채던 애쉬였다.
다행히 잠깐이지만 그 순간 정신을 차린 단테는 평소와 똑같이 그를 멀뚱히 올려다보았고, 그리고 애쉬는 그대로 몸을 돌렸다. 그가 떠나고 난 이후 허둥지둥 다가온 유모의 앞에서 평소처럼 반짝거리던 단테의 눈동자는 또다시 서서히 빛을 잃었다.
한 번 그런 모습을 보여준 것이 기폭제라도 되었던 것일까. 이후로 며칠, 단테는 단 한 번도 제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이미 눈앞의 사물을 바라보는 것을 전혀 할 수 없이 완전히 내면에 사로잡혀 외부의 것에는 반응하지 않았다. 애쉬와 마주쳐도 그것은 마주한 것이 아니었고, 눈을 뜨고 있어도 깨어있는 것이 아니었다.
집안 식구들에게야 그것은 익숙한 상태였지만 애쉬에게는 아니었기 때문에 그의 반응은 굉장히 신경질적이고, 거칠었다. 하루, 이틀,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기세는 신경질적으로 변해가고, 날카로워졌다. 단테를 바라보는 눈빛에서는 참을 수 없는 화가 뚝뚝 흘러넘칠 지경이었다.
사랑스러운 그들의 천사를 노기에 차 노려보는 애쉬가 식구들에게 달가울 리가 없었기에 그들의 눈초리도 점점 사나워져 갔지만 다행히 유모가 가장 먼저 애쉬의 반응을 짐작했다.
그로서는 단테의 저 모습이 제 흥미가 떨어져 관심을 끊은 모습처럼 보이겠거니, 단테의 상황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억지로 저택에 감금하듯 잡아둘 때는 언제고 흥미가 떨어지자마자 모른 척, 못 본 척 하는 것으로 보일 테니 화가 날 수밖에 없으리라 이해했다.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던 부분에서 애쉬 밀러가 ‘외부인’이라는 것을 새삼 자각한 식구들은 그저 속으로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단테의 상태에 대해 설명해줄 수 있는 것은 직계 가족들의 몫이다. 같은 식구이지만 고용인인 그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에 답답하더라도 상황을 그저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날 밤. 가끔 하던 밤 외출을 감행하던 애쉬 밀러가 때마침 열려있던 방문 사이로 여전히 정신을 놓고 있는 단테와 마주했다. 닥터 요한의 진료 후 단테의 상태를 전달받기 위해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조금씩 빛이나 소리에 반응을 보이기 시작하고 있으니 며칠 이내에 정신을 차릴 거라는, 기쁜 소식을 듣고 돌아온 그들이 발견한 것은 발작을 일으키고 있는 단테와 그런 그를 보며 황망해하는 애쉬의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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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것이 꿈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단순히 기억이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쉬이 깨어날 수 없다는 것도 ……알았다. 이 악몽은-기억은- 너덜너덜 만신창이가 되기 전까지는 나를 놔주지 않았다. 끊임없이 지르는 비명과 할퀴어대는 발톱으로 머릿속을 엉망진창으로 휘저어서 따뜻한 빛과 온기가 있는 현실세계로 나갈 수 없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완전히 망가져버리면 이 즐거운, 나를 망가트리는 유희를 더 이상 즐길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것처럼 아슬아슬한 한계선이 되면 선심이라도 쓴 모양 툭, 하고 등을 떠밀었다.
그러나 때가 될 때까지는 그 지옥에서의 나날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다시 겪어야만 한다.
이번에도 벌써 몇 번째 반복되었는지 알 수 없는 악몽의 시작에 나는 체념하여 몸을 늘어트리고만 있었다. 등 뒤의 살가죽이 찢어지고 뼈를 어루만지는 소름끼치는 고통에 뒤이어 드릴이 갈아내는 소리, 뼈를 뚫고 연결되는 쇳조각의 느낌, 뒤이어 치덕이며 다가오는 제 것이 아닌 살덩어리와 그것을 꿰매는 불덩이처럼 뜨거운 손이 느껴진다.
나를 납치했던 그 괴물은 제대로 마취조차 해주지 않고 몇 번이나 등을 가르곤 했다.
그러나 한없이 부족한 마취제, 그것조차도 그나마 자신은 굉장히 많은 배려를 당했던 것이라는 것을, 안다.
다른 아이들은 그나마의 마취제도 없이 생살을 찢고 뼈를 갈랐다. 그들의 처절한 비명, 사지가 꽁꽁 묶여 꼼작도 할 수 없던 그들이 유일하게 뻗을 수 있었던 작고 가는 손가락들.
웃으며 속삭이는 목소리는 다정했다. 끔직했다. 네가 조금이라도 덜 아플 수 있도록 미리 연습하는 거란다. 조금만 기다리렴, 내가 곧 네게 날개를 돌려주마. 너를 잡아놓고 있던 그것들이 잘라버린 날개를 다시 달아줄게. 조금만 기다리렴, my angel.
가족들이 불러주던 따뜻한 단어, 이 세상 누구보다 네가 가장 소중하다며 아끼고 아껴 불러주던 제 애칭이 이렇게 끔찍하게도 들릴 수 있다는 것에 다섯 살의 나는 진저리쳤다.
나를 천사라고 부르지 말라고 악을 쓰고 거부하자 고작 세상에 내려온 지 몇 년밖에 되지 않았는데 벌써 사탄에 물들어 스스로를 부정하고 있다며 성수로 ‘씻어냈다’.
강제로 물속에 머리를 처박고 물이 공기라도 되는 양 숨을 쉬는 행위를 강요하고, 폐에 가득 물이 차서 더 이상 움직이지도 못할 때가 되어서야 건져내어 심폐소생술로 되살려냈다. 그 뒤로도 몇 번인가 더 반항을 했었지만 돌아오는 반응들이 끔찍해서, 납치 후 사흘 만에 어린 나는 더 이상의 반항을 포기했다.
그저 다시 한 번, 딱 한번만이라도 가족들을 볼 수 있기를, 그들 품에 안길 수 있기만을 바랐다.
사랑하는 부모님,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조부모님들, 자신을 보석처럼 아껴주는 누나와 형들, 눈이 마주칠 때마다 환하게 웃어주던 다른 식구들.
그냥 작은 형과 함께 집으로 갈 걸, 집에 가라고 했을 때 말을 들을 걸. 내가 나쁜 아이이기 때문에 벌을 받는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고 싶었다.
눈앞에서 흰 새들이 날개가 잘려 죽어간다. 그 날개는 그대로 수술대에 묶인 다른 아이들의 등 뒤로 옮겨져 강제로 그 작은 육체에 옭아매졌다.
날개를 단 아이들은 팔다리를 구속당해 벽과 천장에 매달렸다. 매달린 아이들은 과다출혈이나 상처의 감염으로 죽어갔다.
수술부위가 썩어 들어가 여린 등에 매달린 날개들이 후드득 떨어져 내린다.
하염없이 울면서 그 장면을 지켜보던 어린 나의 눈에서 눈물이 마른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아마도 그때부터 내 정신은 본격적으로 망가졌던 게 아니었을까.
천사에 집착하는 괴물이 속삭였다. 저 아이들이 너 대신에 지옥에 가주는 거라고. 너를 정화해서 새 날개를 달아 하늘로 돌려보내기 위해서 대신 죽어주는 거라고 말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은 이렇게 속삭였다. 날개를 달아주자 몸이 썩어 들어가는 것은 저것들이 악마라서 그렇다. 사탄이다. 저것들은 사탄이라 지옥불에 떨어지지만 너는 천사니까 내가 하늘로 올려 보내주겠다.
그의 속삭임에 아이들은 더욱 공포에 떨었다. 죽고 싶지 않다고 울부짖었다. 그러나 그것도 얼마 지나지 않아 잠잠해졌다. 어떤 방식으로든 이곳에서 탈출할 가능성은 없다는 것과,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버렸기에 모든 것을 체념해버린 것이다.
그저 고통에 울고, 차라리 빨리 죽어서 그 상황을 벗어나고 싶어 했다.
-……나 정말로 죽으면 지옥에 갈까?
어느날 작은 여자아이가 속삭이듯 내게 물어왔다. 등에 새로 단 날개가 결국 감염을 일으켜서 고열에 시달리던 아이의 이름은 매건이었다. 금발 고수머리에 푸른 눈동자를 한 소녀가 열에 들떠 충혈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던진 질문에 같이 걸려있던 마이클이 조금 움찔거리며 반응했다.
-응? 천사님, 나 지옥에 가는 거야…?
눈물이 글썽이다 아래로 툭, 떨어진다. 멍하니 현실감이 없는 시선으로 그것을 바라보다가 어린 나는 느리게 대답했다.
지옥에 가지 않아. 너희는 천국에 갈 거야.
-정말……? 천국에 갈 수 있어……?
천국에 갈 거야. 너희들도 천사니까 갈 수 있어. 지옥에 가더라도 내가 꼭 데리러 갈게.
-약속 한 거야, 잊으면 안 돼. 꼭 데리러 와, 응?
약속 할게. 절대로 잊지 않아.
환하게 웃으며 울고 있던 매건의 옆에서 결국 마이클의 작은 몸이 축 늘어진다. 그 애는 내 목소리를 들었을까? 천국에 갈 수 있다는 내 대답을 들었을까? 그리고 다음날 아침 기절하듯 잠들었다 깨어난 내 눈앞에서 매건은 싸늘하게 식은 채로 괴물의 손에 들려 방 한 쪽 구석에 던져지고 있었다.
그날 이후 나는 괴물이 자리를 비울 때마다 같이 있던 아이들에게 너희도 천국에 갈 거라고 말해주었다. 괴물의 말은 들을 필요가 없다고, 전부 거짓말일 뿐이라고.
아직 어렸기 때문에 많은 것을 알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저들이 나 때문에 죽어가고 있다는 것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어린 내가 할 수 있던 최선의 일은 그저 나를 진짜 천사라고 믿는 그들에게 너희는 천국에 갈 거라고 말해주는 것뿐이었다.
괴물은 어린 아이들은 모두 천사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날개를 달아 하늘로 올려 보내기 위해 아이들을 납치해서 이런 일을 저지르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괴물의 눈에 들었다.
나를 본 이후로 괴물은 오직 나만을 진짜 천사라고 생각했다. 다른 아이들은 진짜 천사인 나를 발견할 수 없도록 그동안 그를 현혹하고 있던 악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나를 제외한 다른 아이들에게 가혹했다. 죽어버린 아이들에게 미안해서 가슴이 터질 것 같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 잊어버리고 싶을 만큼.
……내가 당했던 육체적인 학대는 다른 아이들에 비할 바가 아니었지만 나는 고작 다섯 살이었다.
한 달 동안 내 앞에서 죽어간 아이들만 열 명이 넘었다. 구출되기 하루 전에 벽에 걸려있던 마지막 아이의 숨이 멎었다. 구출되기 직전까지 나는 내 몸값과 교환될 나의 박제가 어떻게 만들어 질 것인지에 대해 괴물이 그 아이를 통해 보여주는 것을 고스란히 보고 있었다.
너는 날개를 달고도 그것이 썩지 않는구나. 역시 네가 진짜 천사였어. 내가 금방 너를 하늘로 돌려보내줄게. 그리고 남은 네 껍데기는 예쁘게 포장해서 너를 잡아놓고 있던 나쁜 악마들에게 선물해야겠어. 빈 껍질만 남은 것을 보면 얼마나 화가 나서 발을 동동 구를까!
괴물이 웃으며 아이의 배를 갈랐다.
-괴물이 웃으며 내 배를 갈랐다.
괴물이 예쁘게 벗겨야 한다고 중얼거리며 아이의 가죽을 벗겼다.
-괴물이 예쁘게 벗겨야 한다고 중얼거리며 내 가죽을 벗겼다.
괴물이 뿌듯해하며 아이의 빈속에 솜을 채웠다.
-괴물이 뿌듯해하며 내 빈속에 솜을 채웠다.
괴물이 썩으면 곤란하다고 말하며 아이의 남은 부분을 토막 내 땅에 묻는다.
-괴물이 썩으면 아깝다고 말하며 내 남은 부분을 토막 내 먹어치운다.
낄낄대며 웃는 괴물의 덩치가 점점 커진다. 너무나 환해서 모든 참상을 하나도 숨김없이 낱낱이 비춰주던 밝은 형광등이 괴물의 덩치에 가려 어두워졌다. 검게 변한 지옥에 아이들의 울음소리와 비명소리가 울려 퍼진다.
까드득 까드득 뼈를 갉아내는 소리, 생살을 찢고 흐르는 피가 스멀스멀 발을 적시고 홰를 치는 새의 날갯짓 소리가 공간을 가득 메웠다. 투둑 투둑 아이들의 등에서 썩어 뼈만 남은 허연 날개가 눈물처럼 떨어진다.
내 등에는 아이들이 뻗어오던 작은 손가락으로 만들어진 흰 날개가 달려있다.
눈물 젖은 목소리로 누군가 내게 묻는다. 우리를 구원하러 지옥에 와주는 거지? 익숙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그 목소리의 주인은 누구, 매건? 마이클일까? 아니면 엘리?
지나, 지나일지도 몰라. 다섯 살이었던 나보다도 한 살 어렸던 작은 소녀. 수술대 위서 내려오지도 못하고 죽어버린 그 작은 아이에게 너는 천국에 갈 거라고 속삭여 주었던가?
등이 아프다. 뜨거워. 지금까지 몇 번이나 등 뒤로 손을 돌려 날개를 잡아 뜯었지만 힘이 빠져 떨리는 손끝에는 여전히 꿈틀거리는 아이들의 손가락이 와 닿고 있었다.
내 등에 매달린 아이들의 작은 손가락이 상처를 헤집는다. 강제로 실밥을 뜯어내고 반쯤 녹아 붙은 뼈와 살점을 손톱으로 긁어낸다. 너무 아파서 숨도 쉬기 어렵지만 나는 오히려 안도했다.
내 등에 지고 있는 이 아이들의 날개를 뜯어내려는 그 움직임이, 나를, 원망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 같아서.
숨이 멎을 것 같은 강한 충격과 함께 우드득, 한 쪽 날개가 뜯겨 나왔다. 웅크려 몸부림치면서도 피하지 않았다. 나머지 날개들도 뜯어내려는 자그마한 손가락들의 움직임을 느끼며 속으로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다짐할 뿐이었다.
나는 죽으면 지옥에 갈 거야. 나 때문에 죽어야만 했던 그 작은 천사들은 틀림없이 모두 천국에 갔을 테지만 혹시나, 만에 하나, 길을 잃고 잘못 빠진 아이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작은 지나는 너무 작아서 천국으로 데려가주던 천사가 빼먹었을지도 몰라. 꼭 지옥에 내려가서 작은 구석 한군데도 놓치지 않고 뒤져봐야 한다.
우드득 뼈가 갈리는 소리와 함께 날개 하나가 또 뜯어졌다. 비명을 지르며 팔을 물어뜯는다.
생각, 생각을 해야 해. 기억해야해. 잊지, 말아야 하니까, 겨우 이정도를 못 견뎌서 사고를 할 수 없게 되는 것은, 안 돼, 나는 지옥에 가야하니까.
손톱이 벗겨지도록 바닥을 긁으며 남은 날개에 달라붙는 손가락들을 견뎌냈다. 생각이 드문드문 끊기고 있지만 그래도 잊지 않았어.
마이클, 구름 같았던 고수머리가 고왔던 주근깨 남자아이. 내가 납치당해 왔을 때 이미 등에 날개를 달고 신음하고 있었다. 이름도 옆에 있던 매건이 가르쳐줬었지. 나와 같은 초록색 눈동자는 아마 열에 들뜨지 않았더라면 생기 넘치는 한여름의 나뭇잎처럼 반짝거렸을 테지. 그리고, 그리고…….
애쉬.
까득 까득 뼈를 뜯어내는 고통 속에서 문득 익숙한, 그리운, 그리고 중요한 이름 하나가 떠올랐다.
애쉬.
애쉬, ……밀러? ……아니야, 아니야, 너는, 너는…… 애쉬…… 애쉬 샌더슨.
나와 같은 반쯤 풀린 금발 고수머리에 채도만 조금 높을 뿐 연두색에 가까운 내 눈과 가장 비슷한 눈 색을 가지고 있던 소년. 나보다 두 살이 많았고 나와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 했던, 가장 마지막까지 살아 있다가 결국은 토막 나 버려졌던 그 …… 애쉬.
나보다 먼저 날개를 달고, 내게 부작용이 나타나기 전에 감염이 일어나 결국 너도 악마라는 소리를 들어야 했던…… 내가 당했을 짓을 먼저 당하고 처참한 모습이 되어버렸던 그 소년.
애쉬, 너는 천국에 갈 거라는 내 말을 거부하고 지옥에 가겠다고 했었지. 지옥에서 저 괴물을 기다렸다가 모두 갚아줄 거라고, 그리고 혹시나 길 잃은 아이가 있으면 보살피고 있겠다고 했어.
천사인 내가 찾으러 올 때까지, 너희를 구원하러 내가 갈 때까지 기다리고 있겠노라고.
나보다 고작 두 살이 많았던 작은 소년은 그렇게 말하며 내게 오래 살라고 했다. 제가 죽고 난 이후 곧바로 따라 죽을 운명이었던 내게 오래 오래 살아서 괴물이 죽는 것을 보고, 가족들과 만나서 행복하게 살다가 아주 늦게 오라고 했다.
애쉬, 너와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을 만났어.
투둑, 잘 뜯어지지 않아 오랫동안 갈작대던 날개가 떨어졌다. 이를 악물고 웅크리며 남은 날개에 와 닿는 손길을 느낀다.
그도 너처럼 강한 눈빛을 가지고 있어. 생긴 모습은 많이 다르지만 내게 오래오래 살다 오라고 말하던 너의 눈처럼, 강하고 올바른 눈이야.
벌써 세 개나 되는 날개를 뜯어내느라 힘이 빠져버린 작은 손가락들이 천천히 살점을 파헤친다.
지쳐 잠들어 있다가도 네가 깨어 나를 바라볼 때면 그 시선을 느낄 수 있었지. 눈을 뜨고 너를 보면 너는 고통의 와중에도 희미하게 웃으며 좋은 아침이라고 말해주었어.
조금씩 뜯어내는 것은 큰 충격을 받을 때보다 정신을 더 희미하게 만들었다.
언제부터였지, 네가 항상 내 시선을 잡아 눈을 마주했던 것이.
흐릿해지는 시야 안에 나와 눈을 마주치는 네가 있다. 가까워졌다가 다시 멀어지고, 선명해졌다가 흐려지는 네 녹색 눈동자에 누군가의 그림자가 겹치고 있어.
네 눈을 보라고 말했지. 괴물을 보지 말고, 썩어가는 다른 시체들도 보지 말고, 오직 네 눈만을.
그림자의 눈동자는 너와 다르게 녹색이 아니야. 그러나 곧다. 직선으로, 휘는 곳 없이 똑바로 바라보는 눈빛이다. 그 강인함이 네 눈과 겹쳐 보여.
나는 의문도 표하지 않고 너의 녹색 눈동자를 들여다봤다. 눈을 뜨고 있을 때, 괴물이 방해하지 않는 모든 순간에 우리는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며 시간을 보냈지. 네 눈동자의 색이 흐려지고 빛이 닫혀 사라지는 그 순간까지 우리는 서로의 눈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어.
통증은 가라앉지 않고, 내 정신은 벼랑 끝에 내몰렸다. 이대로 조금만 더 안쪽에 갇혀 있다가는 정말로 모두 부서져 버릴 거야. 지옥에 가야한다는 것조차 기억하지 못하게 될 거야. 그러면 안 되는데. 애쉬, 네가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자꾸만 무언가가 흐릿해진다.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도 흐려지고 있어서 기억나지 않아.
그때였다.
갑작스럽게 악몽의 방이 걷혀나갔다. 순식간에 흐릿하게 걸쳐있던 경계를 벗어나 한 쪽으로 끌려나왔다. 거친 손길로 시야가 잡아채어져 강제로 눈이 마주쳤다.
“너 뭐야.”
………애쉬?
구름이 잔뜩 낀 시야 안에 잡히는 것은 누구의?
“너, 뭐냐고.”
애쉬?
……애쉬?
“대체 뭐가 문제야? 사람 신경을 긁는 것도 정도가 있지, 언제까지 이럴 건데?!”
애쉬. 애쉬다. 애쉬구나.
애쉬,
“……나, 지옥에 온 거야?”
“너!!…… ……뭐?”
애쉬.
“지나, 는, 찾았……어?”
“무슨 헛소릴…….”
내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그의 손을 잡으려다 썩은 피에 물든 손을 댈 수 없어 아래로 늘어뜨렸다.
“……아파…….”
“……야, 너 지금 제정신……인 거냐?”
“아파, 애쉬. 애들이 날개, 다 못 뜯었는데. 아직 하나 남아있어.”
“…….”
등이 불타는 듯이 아프다. 뜨거워. 마지막 날개는 살점밖에 뜯어내지 못했어.
“아파, 아파. 뜯어줘. 손이, 손이 안 닿아, 응?”
“……단테?”
“미안해, 그렇지만 이거, 다 뜯어내야 해. 이건 내 날개가 아닌걸. 그런데 손이, 안 닿아.”
“…야, 그만, 그만해, 뭐하는 짓이야!!!”
이건 뜯어내야 하는걸. 손이 잘 닿지 않아, 왜 그 괴물은 내게만 네 장이나 되는 날개를 달아줬던 걸까, 그걸 다 뜯어내는 일은 너무 힘들고 아파. 항상 마지막 날개는 내 손에 닿지 않는 곳에 남아있어서 다른 사람들이 뜯어줘야 하는데. 애쉬, 그러니까, 내 등에, 저것 좀 떼어줘.
“피나잖아!! 단테, 이봐, 정신 차려!!”
“뜯어야해. 도와줘, 아파, 응? 애쉬, 애쉬,”
“그만해!”
“애쉬, 뜯어줘, 아파, 아파!! 뜯어, 줘, 아아아악!!”
“단테!!”
뜨거워, 뜨거워, 뼈에서 뿌리가 돋아나 몸속으로 파고들어와. 아이들이, 어렵게 긁어냈는데 결국 뜯어내지 못해서 다시 들러붙어버려. 안 되는데. 뜯어내야 하는데. 간신히 애쉬를 만났는데 이런 더러운 걸 달고 있으면 안 되는데.
그 괴물에게 네가 달아준 가짜 날개 같은 건 뜯어버렸다고, 말, 해야, 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