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도님 파트
대면
전날 결심한 대로 애쉬는 일찍 일어났다. 나갈 준비를 한 뒤 차를 몰고 나오려는데 고용인이 다급히 쫓아온다.
“저...손님!”
고용인은 뭐라고 부를지 몰라 우물쭈물하다 간신히 한 단어를 내뱉었다. 창문을 내리며 그를 내다보자 숨을 고르며 다시 말을 잇는다. 문득 애쉬는 어제 오늘 같은 고용인을 두 번 이상 만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대체 이곳에는 몇 명이 일하고 있는 걸까.
“벌써 나가시는 겁니까? 이곳에 당분간 머무르기로 하신 거 아닙니까?”
“저도 일은 해야죠.”
굳이 지금 나올 필요는 없는 스케쥴이었지만. 아침부터 이곳 사람들과 엮이기 싫은 걸 좀 알아줬으면 했다.
“그래도 식사라도 하고 나가심이...”
“밖에서 먹을 겁니다. 그렇게 전해주세요.”
회색 크라이슬러는 다시 달려갔다. 저택에서 얼마쯤 떨어진 뒤에야 그는 앞으로도, 라는 말을 붙일 걸 그랬나 고민했다.
오늘의 스케쥴은 라디오 토크쇼와 카테라 촬영, 다른 드라마에 까메오 출연이었다. 그 뒤엔 솔로 데뷔 앨범을 준비하는 데니와 약속이 있었다. 이게 제일 중요하니 앞의 일들은 가능한 빨리 끝낼 생각이었다.
아직 예능감이 없어 좀 힘들었던 라디오 방송이 끝난 뒤, 바로 카테라 촬영 현장으로 갔다. 헤르난데즈 가의 저택에 머무르기로 한 사실이 감독에게까지 알려졌는지 단테의 안부를 묻는다. 아직 몸이 안 좋다고 하니 자기가 자주 들러보겠다고만 전해주고는 배역에 집중했다. 다행히 그 사실은 아는 사람은 감독과 조감독, 각본가뿐인 모양이었고 그런 식으로 질문해 오는 사람은 더 없었다.
출발 시간이 아슬아슬해 사정 말씀드리고 빠져나올까 고민할 즈음 OK사인이 떨어졌다. 부랴부랴 차에 타 코디의 도움을 받아 분장을 마저 지우는데 매니저가 기어를 넣으며 물었다.
“어땠냐?”
“뭐가?”
“헤르난데즈 저택.”
“재수 없던데.”
매니저가 백미러로 묻는 눈길을 보내자 애쉬는 다시 말을 잇는다.
“그렇잖아? 초등학생도 아니고, 너 때문에 우리 애가 아프니 여기서 반성해라. 웃기지 않냐고.”
“푸하하, 그런 거였어? 하긴, 거긴 그럴 만도 하겠네.”
애쉬가 무슨 뜻이냐고 되물으려는 순간 그가 말했다.
“다 왔네. ”
와, 일단 허버트 웨스트부터 족쳐. 매니저는 애쉬를 배려하지 못하는 매니악한 개그를 던지곤 차를 세웠다. 이동용 차가 멈춰선 곳에는 좀비가 창궐하는 단체씬을 찍기 위해 커다란 공터를 다 채울 정도로 꽤 많은 군중이 모여 있었다. 팔을 내밀고 멍청하게 걷는 엑스트라 좀비 역을 보며 애쉬가 물었다.
“형. 내 역할 아직 안 말해준 것 같은데. 저렇게 약 한 것처럼 걸으면 되나?”
“아니, 넌 애인을 구하려다가 대신 물려서 감염자가 되는 엑스트라 역할이야.”
“허? 상대 역이 누군데?”
“요즘 뜨는 크리스티나.”
“난 걔 별론데.”
“걔도 너 별로일 거야.”
애쉬는 매니저를 흘겨보았지만 맘이 급한 분장 스텝에게 팔을 잡혀 끌려갔다.
“어...그래...나 진짜 내일은 꼭 들른다....정말이야 형 믿어라....”
매니저와 함께 식사를 하고 저택에 돌아와 아령 운동을 하면서-방에는 미리 알고 준비해 놨는지 운동기구가 종류별로 있었다.-데니와 통화를 했다. 섭섭한 눈치였지만 사정을 설명하니 어쩔 수 없다는 투였다. 내일 좋아하는 브랜드의 치즈케이크를 사오겠다는 말로 일단락 짓고는 통화를 끊었다.
애 쉬는 좀비 드라마 촬영장에서의 일을 떠올리곤 깊은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벅벅 긁었다. 상대역 아이돌이 어찌나 연기를 대충 하던지 한바탕 싸웠다. 잔뜩 짜증난 상태에서 내지른 그녀의 비명은 정말 신들린 장면이 나왔고 그때서야 OK 사인이 떨어졌다. 약속이 깨져서 멱살 잡고 내 시간 어떡할 거냐고 따지고 싶은 걸 참고 하면 되잖아, 라고 말해줬더니 불퉁하게 째려봤다. 너도 이 집 사람들만큼 재수 없어, 망할.
저택 안에는 각자 자기 일 하거나 잘 준비를 하는지 고용인들밖에 보이지 않았다. 순간 사람 불러놓고 자기들이 피하는 건 아니겠지, 하는 생각도 해보았지만 그만뒀다. 놀면서 이 나라의 정치경제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건 아닐 것이다. 게다가 첫 만남이 아주 뭐 같았으니 그쪽도 피해준다면 차라리 편하다.
항상 하던 계획표대로 운동을 한다. 웨이트를 더 추가해볼까. 몇 번 더 해보다가 힘들어 포기하곤 샤워를 한다. 그러면 오늘의 일과가 끝난다. 아니, 잠깐만. 담배 한 대만 피우고. 3개밖에 안 남았나, 미리 사놓을 걸 후회가 든다. 아인이 선물한 지포라이터를 챙기고 밖에 나가는데 뭔가 작은 게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단테였다.
그는 페리도트 구슬을 연상시키는 눈동자를 맞춰오더니 화색을 띄며 애쉬에게 안겼다. 지금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됐는데, 잔뜩 화가 나 밀치듯이 떼어내니 겁먹은 것처럼 자신을 바라본다. 그때 고용인-저 자는 자주 봤다. 촬영 때 항상 따라붙는 수행원이었다-이 다가와 자신을 노려보며 단테를 방 안으로 데려갔다.
애쉬도 담배 필 기분이 아니라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쾅 하고 문이 울부짖었다.
그 뒤로도 단테는 애쉬를 보면 스킨쉽을 시도했다. 마치 아기가 어른한테 스스럼없이 달려와 안기는 느낌이었다. 볼 때마다 밀쳐내고 짜증을 냈는데도 계속하자 매니저에게 술 마시며 상담을 했다. 협박 및 성추행으로 고소할까 고민이라는 얘기를 어휘력 풍부한 슬랭을 섞어가며 토로했지만 그는 한 마디만 했다.
“그냥 두면 흥미 떨어져.”
“...나도 헤르난데즈 가에 소송 걸어봤자 이미지만 떨어지는 거 알아.”
“뭐, 그런 의미가 없는 건 아니지만. 단테가 자기 싫어하는 걸 모를 정도로 멍청하진 않거든. 그러니까 순순히 받아주면 재미없어서 떨어질 거야.”
그럼 일부러 괴롭히려고 이 짓을 했나? 순간 누구네 천사고 나발이고 하늘로 돌려보낼까 싶었지만, 그날도 단테가 팔에 달라붙자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도 참았다. 역시 처음이 어려웠지 그 뒤에는 점점 익숙해졌다. 그냥 남의 애가 뭣도 모르고 앵겨 붙는다 생각했고 그래서 익숙해졌다. 이제는 언제 달려들더라도 그냥 한번 쳐다보고는 그냥 뒀다.
여전히 숙식 중 ‘숙’만 헤르난데즈 가에서 잠깐 해결하는 나날을 보낸 지 며칠이 지났을 때였다. 오랜만에 시간이 비어 늦게까지 자고 일어난 애쉬는 차 키를 챙겨 밖으로 나왔다. 목이 말랐지만 이 저택에서 뭘 먹거나 마시고 싶지 않았다. 밖에 나오니 단테는 정원을 감상하기 위해 준비해 놓은 테이블에 앉아 아직 싱싱하게 핀 산수국을 바라보고 있었다. 애쉬는 그 앞을 지나쳐갔다. 분명히 볼 수 있는 자리였는데도 단테는 애쉬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매니저 형 말이 맞았나 보다. 하긴 이게 정상이지, 싶어 고개를 뒤로 돌려 단테의 눈을 바라보았다. 둘은 서로 눈이 마주쳤다.
아니다. 뭔가 이상하다. 저 애 날 보고 있긴 한 건가? 날 볼 수는 있는 건가?
마치 금단증상으로 한바탕 난리를 부린 뒤의 엄마처럼 맥 빠진 표정이었다. 눈동자는 미세하지만 쉬지 않고 흔들렸다. 하지만 멸종위기 동물보다 더 철저히 보호받는 단테가 두통약보다 더 센 약을 입에 댔을 리 없고, 왜 이러지?
눈살을 찌푸리며 단테를 노려보았지만 그는 그것이 아예 안 보이는 모양이었다. 생기가 가득하던 눈동자에는 버석버석한 뭔가가 느껴졌다. 싱그럽게 가꾸어진 여름의 정원이 순식간에 색을 잃었다. 매미 소리는 메아리가 되어 공허히 울렸다. 세상의 종말을 결심하고 나팔을 불려는 천사처럼 그는 녹음의 향연을 건조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어쩌면 아무것도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는 말이 더 어울릴지도 몰랐다.
애쉬는 다급히 몸을 돌려 단테에게 뛰어갔다. 갑자기 얼굴을 움켜잡으니 단테는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았다.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는 큰 눈동자는 평소와 별로 다를 게 없었다. 그냥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애쉬는 손을 떼고 왔던 것처럼 다시 뛰어 내려갔다.
그러나 단테가 멍하니 앉아 있는 모습은 그 뒤로도 자주 보였다. 예전처럼 자신을 봐도 달려들지 않자 애쉬는 자신이 주인의 관심을 못 받아 낑낑대는 강아지가 된 것 같았다. 물론 이제 재미없으니까 그만둔다는 거냐, 하고 화가 나는 게 더 컸다. 게다가 정말로 포기한 건지 한 번 부리는 변덕인지 알 수가 없었다. 또 예고도 없이 달라붙어서 비빌지도 모른다. 자꾸 불안하고 초조하니 단테를 보는 눈초리는 더 날카로워졌다. 그런 애쉬를 바라보는 고용인들의 표정도 불편해졌지만 그래도 헤르난데즈의 저택에 머무르는 손님이니 싫은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그날의 일과를 끝낸 저녁이었다. 바에서 잠깐 맥주라도 마시고 올 생각으로 방을 나서는 중이었다. 우연히 열린 옆 방 문 사이로 침대에 멍하니 앉아 있는 단테가 보였다. 여전히 그 흐린 눈을 하고서, 자신조차 보지 않은 채로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멍한 얼굴을 베이비 모니터가 희미하게 비추자 더욱 창백하고 정신 나가 보였다. 머릿속에서 불꽃이 튀어 뇌가 화끈해진다. 가지가지 한다, 정말.
방문을 확 열어젖혔다. 갑자기 밝아지자 단테가 고개를 들었다. 턱을 거칠게 잡아채 억지로 눈을 마주치게 하고 물었다. 폐에 화가 가득 차 숨소리가 귀에 거슬리도록 쌕쌕댄다.
“너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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