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도님
애쉬 밀러는 이렇게 말을 많이 하는 단테를 본 적이 없었다. 이렇게 비명을 지르는 단테는 상상해본 적도 없었다.
가는 몸 깊은 곳에서부터 끌어 올린 비명은 금방 숨이 끊어질 것처럼 처절해 저택이 무너질 것만 같다. 자꾸 등을 할퀴어대어 손톱에 피가 맺히고 흰 등에 붉은 줄이 그어진다. 절대로 낫지 않게 할 작정인지 상처 낸 곳을 또 할퀴고 헤집는다. 마치 덫에 걸린 짐승을 연상시키는 눈을 감고 외면하고 싶어지는 비참함이었다. 대신 애쉬는 단테를 뒤로 눕혀 양 손목을 꽉 쥐어 눌렀다. 겉보기완 달리 꽤 힘이 세서 계속 잡고 있기 힘들다. 부들부들 몸을 떠는 게 죽는 건 아닌가 싶어서 겁이 난다.
소란을 눈치채고 헤르난데즈의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누가 보면 강간 미수 현장인가 싶겠지만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이 없다.
“누가 안정제 좀 줘 봐요! 진정해, 내가 잘못했으니까!”
“헉… 아아, 날개를!!! 헉…”
“무슨 소리야! 그딴 거 없다고!”
몸을 떨면서도 꿈틀거리며 손을 뿌리치려 애쓰는 단테의 얼굴은, 보면서도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 공포에 질려 있으면서도 지독한 집착이 뚝뚝 묻어나는 표정. 초점이 맞지 않아 멍하면서도 녹색 불꽃마냥 타오르는 눈은 눈물에도 꺼지지 않는다. 차라리 날 골탕 먹이려고 하는 연기였으면. 계속 말을 걸어 보지만 여전히 혼이 나가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단테. 정신 차려, 날 봐!”
“하아…헉, 하아…”
숨도 제대로 쉬질 못한다. 심폐소생술이라도 해야 되나, 생각하던 찰나 중년 부인과 케빈이 사람들을 헤치고 달려들었다. 처음 온 날 꽃다발을 가지고 갔던 부인이었다. 케빈이 애쉬를 밀쳐 내자 단테는 도망가려고 몸을 일으키곤 장님처럼 팔을 휘젓는다. 그러나 다시 케빈에 의해 눕혀지고 완전히 옭아매어졌다. 부인은 협탁 위에 있었던 약물과 주사기를 챙기더니 능숙하게 주사바늘을 꽂았다. 그러자 오직 애쉬만 보이는 것처럼 그에게 떨리는 손을 내밀던 단테는 죽은 것처럼 몸을 축 늘어뜨렸다.
무심코 내민 손을 잡은 애쉬는 눈길을 돌려 방 바깥쪽을 바라보려다가 자신을 노려보는 눈길들을 마주하고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이 저택 안에선 혼자라는 사실을 다시금 자각하곤 잡은 손을 놓았다. 책임을 묻는 눈동자들. 자신도 미안한 마음이 없잖아 있었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애쉬는 유모와 함께 단테를 쓰다듬으며 상태를 살피는 그들에게 말했다.
“다쳤어요, 단테. 등을 할퀴었어요.”
케빈이 화를 참는 표정으로 애쉬를 바라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애쉬는 이를 바득 갈았다. 도대체가 전후설명 없이 끌고 와서는 무작정 화만 내다니, 내가 언제까지 참아야 되냐고. 발작 일으킨 건 미안하지만 내가 알고 한 것도 아니고, 사람 데려와 놓고 무시하는데 화가 안 나? 그렇다고 애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놨는데 화풀이할 수 있는 것도 아냐. 나가자. 일단 짐부터 싸고 여기 나가겠다고 얘기 좀 해야겠어.
모인 사람들을 헤치고 방을 나가려는데 누군가 어깨를 붙잡는다. 단테의 큰형 윌리엄이었다. 평정을 유지하고는 있었지만, 갑작스런 상태에 놀라 동요했는지 눈빛이 떨렸다.
“봐 줬으면 하는 게 있다.”
갑작스런 소동에 지쳤는지 목소리에 마찰음이 섞여 있어 다시금 미안함을 느꼈다. 첫인상이 안 좋았고, 고의가 아니었다지만 그는 피해자의 형이었다.
“네?”
“네 방에서 기다려.”
저절로 되물음이 나왔으나 윌리엄은 대답 없이 완고한 태도로 쌩하니 가 버렸다. 이젠 날 붙잡아도 소용없단 걸 알 텐데, 대체 뭘 바라는 걸까. 대신 애쉬는 자신을 바라보는 고용인들의 눈길이 제법 복잡해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분노를 베이스로 의혹과 두려움, 미묘한 희망을 첨가한 눈길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애쉬는 방에 돌아왔고, 놀람과 분노가 진정되니 여러 생각을 떠올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까 그 반응은 정상이 아니다. 어쩌면 단테를 아이처럼 감싸고 도는 게 그냥 막내가 예뻐서가 아니라 저 지경이 될 정도의 뭔가가 있어서일 수 있다. 매니저의 그럴 만도 하다는 말은 대체 무슨 뜻일까. 명문가 막내가 연루된 사건이면 아무리 쉬쉬한다 해도 기사가 났을 것이다. 애쉬는 그룹 해체 후 멀리하던 인터넷을 다시금 손댈 필요를 느꼈다.
그때 낮은 노크 소리가 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자 그가 내민 것은 꽤 오래돼 보이는 비디오 테이프였다. 작동이 될지 의심스러운 그것을 투입구에 넣자 지직거리는 노이즈가 화면에 가득 찼다. 애쉬가 고장난 줄 알고 자리에서 일어나 꺼내려는 순간, 팟 하는 소리와 함께 화면이 나타났다. 중간중간 노이즈가 섞여 있었지만 회색 폐허임을 알 수 있었다. 굳이 촬영할 필요가 있나 싶을 정도로 미쟝센이 엉망인.
헌데 영상 속 낮고 음침한 목소리에 무언가 꿈틀대며 모습을 드러냈다. 애쉬는 칙칙한 폐허 안에서 밝게 빛나는 백금발을 가진 그 아이를 알아볼 수 있었다. 단테였다. 깃털 이불 같은 걸 뒤집어쓴 아이는 수척하고 힘없어 보였다. 애쉬의 눈이 동그래졌다. 아이는 목소리의 말에 따라 모습을 완전히 드러냈다.
아주 예뻐
그래
… 이쁘긴 개뿔이. 애쉬는 주먹을 콱 움켜쥐었다. 영상 속 단테는 억지로 꿰매어진 날개를 네 장이나 달고 화면을 바라보며 웃었다. 아기천사의 웃음이라고 희화하기엔 너무 섬뜩했다. 그렇다고 악마라기엔 너무 가엾다. 저렇게 무생물처럼 웃을 수 있다니. 저렇게 무거운 날개를 달고 몸을 일으킬 수 있다니. 당장 화면 속에 들어가 억지로라도 뜯어내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는 이 화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었다. 단테 R.헤르난데즈. 그의 과거를 증명하는 확실한 증거물, 그리고 외부인으로서는 애쉬가 최초로 보게 된 영상이었다. 이러한 천박한 문장으로는 묘사할 수 없는 뒤틀린 욕망이 추악한 날개를 달고 펼쳐지는 비디오이기도 했다.
애쉬는 차갑게 굳은 얼굴로 검게 암전된 화면을 바라보았다. 더 이상 영혼 없이 웃는 아이의 형상은 보이지 않았지만 머리를 호되게 맞은 충격은 가시지 않았다. 자신이 어떻게 화면을 부수지 않았는지 믿기지 않았다. 웅웅 울리는 머리를 감싸 쥐었지만 진정은 되지 않았다. 비디오 테이프가 못 먹을 걸 뱉는 것처럼 툭 튀어나왔다. 윌리엄은 말없이 테이프를 집어 들었다. 직접 확인했으니 어떠냐, 이제 이유를 알겠냐 따위의 고리타분한 질문은 하지 않고, 그 역시 보기 괴로웠는지 미간을 꾹 눌렀다.
어색한 공기가 둘 사이를 무겁게 내리눌렀다. 먼저 입을 연 쪽은 애쉬였다. 최대한 담담한 척 했지만 아까의 충격 때문에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는 건 막을 수 없었다.
“시간이 늦었어요, 주무세요.”
윌리엄은 피곤에 마른 입술을 열어 말을 꺼냈다.
“이 사건 말이다.”
“……?”
“피해자들 중에 너와 이름이 같은 아이가 있었지. 애쉬 샌더슨, 단테와 가장 최근까지 시간을 보낸 아이였다.”
애쉬는 쿵 하고 가슴 속에 무언가가 떨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그래서였나, 그래서 나에게 관심을 보인 건가… 하지만 윌리엄은 애쉬의 다음 말을 듣지 않고 간단한 밤 인사 후 방을 나갔다. 그 나름의 애쉬를 위한 배려일 것이다.
문득 애쉬는 사람 심란하게 해 놓고선 갈 거냐고 따지고 싶어졌지만, 그러기엔 일찍부터 죄 없이 망가져버린 작은 단테에게 너무나 미안했다. 입에서 나온 깊은 한숨이 방을 꽉 채운다. 목구멍에 휴지뭉치가 잔뜩 눌러 담긴 기분이다. 답답하다. 그저 답답하다. 결국 담배 한 개피를 꺼내 발코니로 나왔다. 여름인데도 밤공기가 차서 조금이나마 가슴이 뚫리는 기분이었다.
“후우…….”
연기를 한 모금 빨아내다 뱉는다. 가능한 그 영상을 떠올리고 싶지 않았지만 그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범인과 갇혀 무자비한 폭력을 묵묵히 받아내었어야 했을 작은 아이. 영상 속의 그 모습은 그저 약과일 것이다. 피해자들이라니 단테랑 비슷한 꼴을 당한 다른 아이들이 있다는 얘기겠지. 즐겼지. 분명 즐겼을 것이다. 돈 때문이라면 쓸데없이 날개 따위를 몸에 달아놓진 않는다. 상상하니 소름이 으스스하게 돋는다. 애쉬는 몇 마디 욕을 연기와 함께 뿜어내었다. 변태새끼, 지랄 한번 창의적으로 하네. 지옥에나 떨어져라.
자신이 그런 일을 당했다면, 아니면 지젤에게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너무 엄청난 일이라 그런 일을 겪는 것 자체가 상상이 안돼서인지, 후자에 더욱 이입이 됐다. 어린 나이에 뒤틀려버린 동생을 바라보는 윌리엄에게 공감이 되어서일지도 몰랐다. 무튼 그랬다면 평생 지젤을 못 볼 것이다. 볼 때마다 우느라 정신없을 테니. 지켜주지 못한 게 너무 미안해서, 그럼에도 살아야 함이 너무 힘들어서. 하필이면 그 자식이 천사라고 부르는 바람에 더 심란했다. 굳이 징그럽게 천사라고 부르는 이유가 이거였나. 윌리엄이 가져가는 바람에 비디오를 부숴버리지 못하는 게 아쉬울 지경이었다.
옆방은 아직 불이 꺼져 있다. 저택은 언제 소동이 있었냐며 시치미를 떼고는 꽤나 적막해졌다. 아까 그 부인과 케빈도 그렇고, 한 두 번 해본 게 아닌 것처럼 노련한 대응이었다. 단테도 이곳 사람들도 이런 고통을 몇 번이나 겪어왔단 말인가.
아직 다 타지 않은 담배를 거칠게 비벼 끈다. 잠이 오지 않지만 억지로 침대에 든다. 커피를 한 드럼 마신 것처럼 쿵쾅거리는 가슴이 쉽게 진정되지 않는다.
애쉬가 만난 ‘맘이 아픈 사람’들은 절망과 가난이라는 연쇄에 휘말려 나락으로 떨어진 인간들이었다. 멀리 갈 것까지 없었다. 폭력 남편에 시달리다 가까스로 도망친 옆집 아줌마, 초등학생 때부터 마약을 한 동네 아이라던가… 자신이야 운이 좋아 말려들지 않았을 뿐이지 그럴 처지가 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었다. 마약 중독 치료 병동에 입원한 엄마가 그랬다. 사실을 알기 전까지 단테를 사회성 없는 어리광 부리는 도련님이라고 생각했었다. 상류층들은 이런 고통은 평생 모르고 살 것 같았다.
허나 절망이 거칠게 할퀸 상처에는 명문가도 무력했다. 그들의 재력과 권력이 절망을 헤쳐 나가는 데 도움은 되었지만 강한 정신까지 살 수는 없다. 결국 이겨내야 하는 건 단테 자신이니까. 그들은 분명 단테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제각기 가슴에 부조처럼 아로새겨진 단테의 괴로운 얼굴을 필사적으로 지우기 위해 싸우고 있는 것이다. 애쉬는 단테의 가족들이 왜 자신을 데려왔는지 조금은 납득이 갔다. 헤르난데즈 가가 친구나 그 밖의 우연적인 인간관계들까지 줄 수는 없다. 그래서 단테가 관심을 보인 나를 앞뒤 안 가리고 데려온 것이다. 투병이 길면 귀찮고 지칠 텐데 이제까지 포기하지 않고 단테를 지탱한 그들이 잠깐이나마 존경스러워졌다.
누군가는 외모에 재력에 두뇌에 모든 걸 갖췄으니 그 정도는 해야 공평하지 않느냐고 할지 모른다. 자신도 그런 생각이 완전히 떨쳐지지 않는다. 헤르난데즈가 재력가가 아닌 보통 중산층 이하였다면 단테는 더 오랫동안 심하게 고통 받을 테고, 배우로서 만나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젠 존재하지 않는 사람의 그림자에 눌려 평생을 시달려야 한다면, 그럼에도 누군가에게 아프다 한마디 못하는 고통이라면 계급이나 재력은 허무할 뿐이다.
단테, 내가 널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난 네가 겪어내야 했을 상처와 고통을 짐작밖에 하지 못한다. 살아오면서 충격적인 일이 없던 건 아니지만, 누가 화냈다고 발작까지 할 정도로 마음이 힘든 적은 없다. 내가 임상치료사나 정신과 의사도 아니니 치료해 줄 방법도 몰라. 사실 네가 나한테 뭘 바라는지도 모르겠어. 그냥 애쉬랑 이름이 같다고 어리광 받아 주기만을 원하는 거야? 난 애쉬 샌더슨이 아냐. 애쉬 밀러야, 너와 고통을 함께 겪은 친구가 아니라고. 네가 아무리 매달린다고 해도 이해하는 척밖에 할 수 없는 애쉬 밀러.
지긋지긋하다. 젠장, 뭘 그리 어렵게 생각해. 솔직히 내가 여기 있는 것도 가족들이 유난떨어서고, 단테는 그냥 어렸을 적 친구랑 이름이 같으니 나랑 친해지고 싶은 거다. 그리고 멋대로 그 친구에 나를 투영하는 거지.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려 했지만, 그럼에도 단테를 그냥 놔둘 수 없다는 의무감과, 또한 어린 소년에 머물러 있는 그에 대한 안쓰러움과, 그의 환경에 대한 질투심과 그런 생각을 했다는 죄책감이 마구 뒤섞인다. 아무리 생각을 바꾸려 해도, 진심으로 그의 고통을 이해하고 감싸주고 싶다는 고결한 희생정신까진 들진 않는다. 그에 대한 미안함이 들었다가 그에 대한 합리화가 엎치락뒤치락 절대 끝내지 않을 것처럼 레슬링을 한다. 일이 없다면 종일 이 생각만 할 것처럼 쉬이 잠이 오지 않는다. 지금쯤 옆방에서 늘어진 단테에게 한 가지만 묻고 싶다. 너는…
어떻게 잠들었는지 모르지만 감긴 눈이 떠졌다. 삑삑거리는 알람음이 귓가를 때린다. 둔중한 머리를 가까스로 현실로 끌어올린다. 핸드폰 알람을 끄고 하루를 시작한다. 오늘부터 연기 레슨이 있으니 저택에 머물 시간은 더 적어질 것이다. 게다가 곧 촬영이 재개될 테니 그 전에 가족들에게 들러야 한다. 이 저택에 잡혀 있느라 가족들은 화상 채팅으로밖에 보지 못했다. 경찰 배려 안하는 범죄자들 때문에 고생하는 아버지는 더더욱 그렇고.
준비를 끝마치고 방을 나오는데 누군가 폭 안겨왔다. 당연히 단테였다. 도자기처럼 하얗고 여려 손대면 깨질듯이 보이지만 옷 안에는 꽉 잡혀 단련된 몸이 느껴진다. 전에는 이질적으로 여겼지만 이제는 그 이유를 안다. 이상하리만큼 자꾸 밀쳐내도 뛰어와 안기는 이유도 안다. 그저 나한테 친근감의 느끼는 것 뿐만 아니라, 어제처럼 정신적 충격으로 기억을 잃는 거겠지.
무의식적으로 손을 들어 밝은 금발을 헝클어뜨리듯 쓰다듬는다. 처음 보인 반응에 어리둥절, 고개를 갸웃 기울인다.
“왜?”
“…….”
금방 방긋 웃으며 머리를 부빈다. 그런 일이 있었으면서 어떻게 애같이 웃고 스스럼없이 안길 수 있는지 이해가 안 간다. 한 번 더 쓰다듬어주고는 지나쳤다.
“일 가야 돼. 너도 얼른 복귀해.”
차를 몰고 고가도로로 나온다. 슬슬 출근 시간대라 좀 밀리나? 신호를 기다리자니 자연스럽게 단테가 떠올랐다. 입에 문 담배맛이 쓰다. 오늘 아침에도 마주쳤지만 어색한 건 변함이 없다. 단테가 일방적으로 살가울 뿐이고, 난 최소한의 화답을 해 주는 것 이상은 모르겠다.
연기 레슨을 받으면서도 단테 일에 정신이 팔려 있어 자주 지적을 받았다. 보다 못한 매니저가 날 따로 불러냈다. 친구가 정신적 문제로 발작을 일으킬 정도로 힘들어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털어놓았다. 단테라고는 얘기 안했지만 그는 눈치 챈 모양이었다.
“언제라도 털어놓을 수 있게 편안하게 대하면서, 상처받지 않도록 보듬어줘야 돼. 천달러 짜리 꽃병이라고 생각해봐. 항상 닦아주고 꽃을 바꿔주지만 언제나 테이블에 꺼내 놓는 거지.”
“어렵네.”
“본인은 더 어렵겠지. 그리고 강요하지 않는 거! 이게 제일 중요해. 때가 되면 그 애가 스스로 말할 거야.”
애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얘기를 들어줄 상대가 있다는 건 좋은 것이다. 단테도 누군가에게 털어놓으면 좋을 텐데. 너무 끔찍해서 입에도 담기 싫은 걸까? 아니면 가족들이 자세한 진상을 듣고 상처 받을까 겁나는 걸까? 하지만 상처 입은 본인보다 아플까? 만약 자세한 얘기를 듣는다 해도 어디가 얼만큼 아픈지는 모를 것이다. 그건 단테를 한없이 아끼는 가족들도 마찬가지다. 자기도 남 얘기 나한테 잘 하는 편은 아니지만, 가족들이나 오래된 고용인들이 설마 어디 말 옮기지도 않을 테고. 다들 단테가 조금이나마 얘기해주고 고통을 덜기를 바랄 텐데.
“그럼 말하지 않으면? 내가 불편해서 말 못하는 건가?”
“애쉬, 심리치료는 배우가 아니라 정신과 의사가 하는 거야. 그리고 네가 신경 써서 대해주는 것만으로도 그 친구는 안정이 될 거야.”
“정말?”
“그럼. 내 주니어를 걸고 맹세하지.”
대충 알겠다. 고개를 끄덕이자 어깨를 툭 치고는 볼을 꾹 찌른다.
“알았으면 집중하고 다시 가자?”
언제나처럼 익살스레 짓는 미소에 애쉬도 마주 웃어보였다. 생각해봐야 답이 나오지는 않는다. 언제나 그랬다. 조금이라도 행동을 해야 그나마 길이 보였고, 그래서 여기까지 왔다. 그리고 어떻게 해야 될지도 대강은 안다. 지금은 당장 해야 할 일에 집중해야지. 애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사 성격이 급해 정신없었지만 애쉬는 어찌저찌 교습을 따라잡았다. 보통 사람이 채찍과 당근을 100 내에서 나름의 비율대로 조합해 쓴다면 그 강사는 최대치가 120~150쯤 되는 것 같았다. 휘몰아치는 페이스에 맞추느라 끝나고 나서는 순간 멍해있었다. 매니저가 저 사람이 빡세게 가르치지만 단기적인 실력향상에 최고니 당분간 힘내라고 말해주었다. 매일 레슨 일정이 잡혔는데 다 소화할 수 있을지 걱정된다. 돌아가면 복습이나 해야지.
그 외에 CF 촬영이나, 이런저런 일들을 처리하고 난 애쉬는 야채 건더기마냥 처진 몸을 끌고 저택에 도착했다. 이미 저녁이 훌쩍 지나 있었다. 문득 이 집 사람들은 뭘 먹을까 궁금해졌다. 적어도 빅맥세트나 냉동피자 같은 걸 식사로 먹진 않겠지. 다들 일이 많고 까딱하면 식사를 못할 테니 이곳 요리사들은 3분 만에 샌드위치 만드는 노하우를 갖고 있을지 모른다. 문득 명문가 사람들의 식단을 맛보지 못한다는 게 조금 아쉬워졌지만, 역시 단테 가족들 보면서 밥 먹으면 체할 것 같다.
항상 세워놓는 곳에 주차해 놓고 2층에 올라가니 단테가 쪼르르 뛰어온다. 달려들어 안으려는 걸 뒤로 슬쩍 몸을 돌려 피하곤, 돌아보는 사이 머리를 쓱쓱 쓰다듬는다.
“하아, 너 아프다면서 아직도 안자?”
졸리지도 않은지 기운차게 안겨서는 머리를 부비고 올려다보며 눈을 반짝인다. 애쉬는 다시금 한숨을 쉬었다. 어린애가 이러면 귀엽기라도 하지, 단테는…그냥 안쓰럽게만 느껴진다. 절망에 드리운 닻에 매여 있음을 이제는 안다.
“뭐해, 들어가서 쉬어. 환자 깨웠다고 혼나긴 싫다고.”
단테의 손을 풀고 방에 밀어 넣으려던 애쉬는 옷 사이로 살짝 보인 등허리에 눈길이 갔다.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에는 반창고와 붕대가 붙어 있었다.
역시 그냥은 못 둬.
애쉬는 냉큼 단테 방에 먼저 들어가 침대에 앉았다. 예상치 못한 행동에 눈을 동그랗게 뜨는 단테에게 제 방인 것처럼 손짓한다.
“이리 와.”
무슨 뜻인지 확신을 갖지 못하고 긴가민가하던 단테는 그의 옆자리에 앉았고, 애쉬는 짜증 섞인 한숨을 푹 쉰다.
“거기 말고.”
애쉬는 단테를 잡아 끌어 자기 앞에 앉혔다. 눈을 끔벅거리더니 살짝 상기된 표정으로 애쉬를 올려다보자 팔을 감아 끌어안는다. 단테의 상처 난 등에 몸을 밀착시켜 꼭 안는다. 덧나진 않겠지, 그러라고 붕대 쓰는 건데. 다친 부위만 좀 더 뜨거운 듯도 하다. 피부는 크림처럼 부드럽지만 오랜 고통에 단련된 단단한 근육과 뼈가 느껴진다. 더러운 날개 따윈 깃털 하나 느껴지지 않는다.
“아무것도 안 배기지?”
“…….”
“ 날개 없지?”
단테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 심장 뛰는 거 느껴져?”
다시금 끄덕이는 금빛 머리. 애쉬는 지금 단테의 가슴에 손을 대면 그의 가슴 고동을 느낄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지만 실행에 옮기진 않았다. 그저 실크를 풀어 한 올씩 심은 듯한 머리칼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단테는 등에 닿은 애쉬의 심장 고동을 느끼려는지 몸을 더욱 기대고 눈을 감았다.
“애쉬.”
애쉬 샌더슨으로 아는 건 아니겠지? 그러나 묻지는 않기로 한다. 문득 손에 뜨거운 액체가 한 방울 떨어졌다. 피는 아닌 것 같은데. 그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번만이야, 애쉬는 단테를 더욱 품 속 깊이 끌어안았다.
그제서야 밝게 빛을 발하며 깜박이는 기계가 신경 쓰였다. 아, 맞다. 베이비 모니터 있었어. 뭐 베어허그도 아닌데 죽이려고 하진 않겠지. 그러면 진짜 살인미수로 고소할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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