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도님 파트
직시
헤르난데즈 가 저택 앞에 회색빛 크라이슬러 한 대가 멈춰 섰다. 아무나 탈 법한 평범한 차라 지나가는 사람이 보기엔 과연 이 저택에 용건이 있는 걸까, 싶었지만 놀랍게도 철책같던 문이 천천히 열렸다. 놀랍게도 이 차는 신년파티도 아닌데 헤르난데즈 가의 부름을 받고 왔다. 너무 평범해 상류층의 파티 초대를 받아본 적 있을지 의심되는 크라이슬러 안에 앉아있던 애쉬 밀러는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는 크루즈 여행 뒤 어딘지 맥 빠져 보이던 단테의 얼굴을 떠올렸다.
지금 단테가 아프다. 자기 분량 줄어드니까 이제 아파도 되겠지. 하고 결심하고 앓는 것처럼 때맞춰 드러누웠다. 아니면 자기 출연분을 모두 끝낼 때까지 버티다가 쓰러진 걸지도 모른다. 어쨌든 여행 후의 여독이 풀리지 않아 병이 났는지, 시름시름 앓다가 저택에서 요양 중이었다. 그 뒤 소속사에게 헤르난데즈 가에서 연락이 왔다. 어째서인지 그들은 나에게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방문하라고 재촉해왔다. 매니저 형이 협박 수준이라고 했던가.
고용인의 안내에 따라 주차하고는 정원을 바라보다가 혀를 쯧 찬다. 정원에는 맑은 물빛의 수국이 흐드러지게 피어 귀족의 성처럼 위용을 뽐내는 저택에 고급스러운 아름다움과 계절감을 더하고 있었다. 손에 들린 수국 꽃다발을 바라본다. 해바라기로 사올걸. 들어가기도 전에 기분이 나빠진다.
저택 안에 들어서니 더 굉장했다. 건축에 조예가 없는 애쉬의 눈에도 이 집이 상당히 오래되었지만 섬세한 손길과 안목에 의해 철저히 관리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채광이 용이하도록 커다랗게 낸 창과, 꽤 옛날 양식임에도 깨끗하게 관리된 조각과 넓은 홀 등은 이 집의 역사를 짐작케 했다. 이 웅장한 저택은 구획이 넓고 커서 시원시원한데도, 어쩐지 벽이며 기둥 하나하나가 자신을 내려다보며 사방으로 압박하는 기분을 느끼게 했다. 반짝거리는 대리석 계단은 한 단 한 단 쌓아 올려졌고, 그 끝에서 헤르난데즈 가의 사람들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단테가 이곳에 있었다면 이제까지 보던 것 중 제일 반가웠을 것이다. 어쨌거나 저렇게 경멸 섞인 눈으로 내려다보지는 않았을 테니까. 특히 노인과 남성 둘은 눈빛만으로 자신을 불태워 죽일 기세였다. 짐작은 했지만 다른 제작진이나 배우들 놔두고 자신만 따로 부른 이유가 병문안 오라는 친절은 아닌 모양이다. 애쉬도 팔짱을 끼고 그들을 마주보았다. 사람을 불러놓고 아니꼽게 대한 이상 자신도 곱게 나올 이유가 없었다.
노인이 저벅저벅, 위압적인 발걸음 소리를 울리며 계단을 하나하나 내려왔다. 잔뜩 화난 노인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았다. 그가 그 유명한 호텔왕임을 애쉬도 알고 있었지만 서로 고깝게 얼굴을 마주보고 있는 지금은 그저 짜증나는 노인으로 보일 뿐이었다. 술마신 산타클로스보다 더 빨개졌다고 생각할 즈음, 느닷없이 노인의 발이 얼굴로 날아왔다. 재빨리 몸을 옆으로 기울여 피했다. 자신의 발차기를 피하니 더 화난 눈치였다. 화난 건 애쉬도 마찬가지였다.
“무슨 배짱으로 혼자 왔는지 모르겠군.”
“부자 동네는 치안이 좋잖습니까. 이제 보니 그런 것도 아닌 것 같지만요.”
“뭣이...!”
“자, 자.”
단테의 할머니로 보이는 여노인이 중간에 끼어들었다. 노인은 여전히 씩씩대고 있었지만 순순히 뒤로 물러났다.
“이럴 게 아니라 방에 들어가서 얘기하지.”
명문가 남자들의 대화법은 화끈했다. 그들 중 나이가 제일 적은 남자에게 한 대 맞아 쓰라린 입가를 문질러 가면서, desert와 dessert 이니셜도 헷갈리는 머리와 없어져가는 이성줄을 쥐어짜봤지만 결론은 이거였다. 애쉬는 꽃다발을 어디론가 들고 가는 고용인을 노려보다 입을 떼었다. 필요 없으니 버리려나?
“그러니까, 단테가 지금 사춘기 여고생처럼 저 밉다고 자리에 드러눕는 천인공노할 일이 터졌으니 제가 고쳐내란 겁니까? 여러분들 주장을 누가 들으면 제가 강간해서 임신시킨 줄 알겠습니다.”
“말은 제대로 해라. 니가 스트레스를 줘서 천사가 앓고 있으니 어떻게든 책임지란 거다.”
애쉬는 내가 지금 말 조심하게 생겼냐는 눈빛을 그의 큰형에게 보냈지만, 헤르난데즈의 후계자답게 러쉬모어 산의 조각처럼 결연했다. 남 앞에서 대놓고 천사라니 정말 간질간질하다. 대체 무슨 정신인가 싶었지만 다들 당연하다는 태도라 자신이 이상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는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이렇게 싸고도니 애가 다섯 살짜리 마냥 그 꼴이지. 하기야 집안이 워낙 빠방하니 평생 수줍은 어린아이처럼 살아도 괜찮긴 하겠다.
그는 단테를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여동생은 인간인지 천사인지 모를 외모라고 했지만, 애쉬가 보기에는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를 외모였다. 물론 자신이 소속됐던 그룹에도 여린 미소년 콘셉트의 멤버가 있었지만 단테는 여자에 더 가까워 보였다. 게다가 툭 치면 쨍그랑하고 깨어져 버릴 듯한 여린 몸과, 항상 수행원이 따라다니며 희귀동물처럼 보호받는 모습은 그를 더욱 눈살을 찌푸리며 보게 했다.
잠깐 생각에 잠겨 있으니 방금 한방 먹였던 남자가 어딜 딴생각 하냐는 듯 주먹을 내보이며 을러대었고 애쉬는 뱀처럼 쉿 소리를 내며 그 자를 위협했다. 그 때 단테의 누나가 말을 꺼냈다.
“밀러, 당분간 여기 머무르는 게 어때?”
그 한마디가 중요한 작전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모두가 그녀를 향해 돌아보았다. 특히 할아버지와 단테의 두 형은 자살 작전테러 신호라도 들은 병사의 표정이었고, 애쉬 역시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들어보니 할아버지랑 우리 천사의 두 형이 먼저 난리를 피워서 그렇지, 얘가 특별히 단테를 어떻게 하려고 한 것 같진 않거든?”
“누난 이 자식 태도를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
“먼저 때렸잖니.”
할머니 한 분의 정확한 지적에 단테의 작은 형은 입을 다물었다. 단테의 누나는 다시 말을 이었다.
“넌 단테가 어려워서 먼저 피했다고 하던데?”
“누구나 그럴 겁니다.”
아 까보단 좀 누그러졌지만 역시 따끔한 말투였다. 누나가 눈살을 찌푸렸지만 애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애쉬는 여동생 지젤한테 그녀가 런칭한 브랜드 제품 사지 말라고 욕해줄까, 하고 유치한 복수를 고민했다. 할아버지가 잔뜩 화가 나 소리쳤다.
“우리 천사가 뭐 어때서!”
“왜 저한테도 천사일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지금 뭐라고!”
그는 버럭 소리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다른 사람들도 인상이 험악해졌다. 당사자까지 퉁명스럽게 나오니까 누나도 지쳤는지 한숨을 푹 쉬었다. 막내가 아무리 예쁘다지만 애가 앓으면서 자기 이름 한번 불렀다고 다짜고짜 화부터 내다니, 재벌가 사람들은 다 이런가 싶어 벌겋게 달아오른 노인의 얼굴을 차갑게 노려보고 있을 때였다.
가느다란 목소리가 잔뜩 열 오른 공간을 가로질렀다.
“지금 아픈 단테를 생각해 줄 순 없겠니?”
애쉬는 할아버지에게 멱살이 잡힌 채 다른 할머니를 바라보았다. 진심으로 손자를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잔뜩 노기가 서린 눈초리가 조금 풀어진다. 그때서야 다른 사람들도 자신이 너무 열 냈다 싶었는지 진정하는 기색을 보였다.
“백번 양보해도, 전 피해자와 가해자를 붙여놓겠다는 생각을 이해 못하겠습니다만.”
“그래! 이런 놈은 아주...”
“의도는 아니었겠지만 네가 상처준 건 맞으니, 니가 풀어내야 된다고 생각한단다.”
틀렸다. 상처 줄 의도는 차고 넘쳤다. 차라리 제대로 상처받아서 근처에도 접근 못했으면 했다. 단지 갑자기 이 가족들에게 불려오는 상황을 상상도 못했을 뿐이지.
그는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비참하게 만들었다. 초라한 자신에게 짓눌려 점점 어둠 속으로 가라앉히고 먼 곳에서 혼자 빛나는 별이었다. 애쉬에게 이들은 그 별에 홀린 추종자들처럼 보였다.
기분 더럽군. 침이라도 뱉고 싶다. 애쉬는 제 옷깃을 단단히 잡은 노인의 손을 힘주어 풀어내고는 홱 돌아섰다.
“알겠습니다, 말씀대로 하죠.”
할아버지가 어딜 가냐고 고래고래 소리치자, 짐 가지러 간다고 대답하는 소리가 복도 멀찍이서 들렸다.
옷가지와 간단한 짐을 챙겨와, 당분간 헤르난데즈 가의 저택에 있을 거라고 매니저에게 연락하고는 발코니에 나와 담배에 불을 붙였다. 씁쓸한 연기가 목구멍으로 들어가자, 속에 꾹 눌러 담긴 게 풀어지는 기분이 든다. 그때 어디에선가 까칠한 목소리가 들렸다.
“작작 태워라. 내 스윗 하트가 목 아파한다고.”
정말 질린다. 애쉬는 담뱃불을 끄고는, 이걸 던져줄까 잠깐 고민하다가 발코니의 창을 닫았다.
방이 몇 개나 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 데나 집어넣을 거라 생각했으나 의외로 꽤 널찍하고 좋은 곳을 배정받았다. 의도했는지 단테의 방 바로 옆이었다. 그 사실을 떠올리자 다시금 머리가 아파와 담배에 저절로 손이 갔다.
결국 부엌 뒷문 같은 곳으로 나와 쭈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웠다. 매캐한 담배 연기가 그리다 만 흐린 붓터치 모양으로 공중으로 올라갔다. 이렇게 넓으면 정원에 쥐 몇 마리쯤 돌아다닐 것 같은데 벌레소리 하나 없이 상당히 조용했다. “내 팔자야, 맞아 죽을 짓 하는 놈들도 잘만 사는데 뭐했다고 여기에 잡혀 왔냐. ”혼자 중얼거려 보았지만 너무 조용하니 어색해서 다시 입을 다물었다.
단테. 미들네임은 생각 안나지만, 헤르난데즈라는 건 확실하다. 애쉬는 중간에 복잡한 단어 없이 바로 성으로 직행하는 풀네임을 갖고 있었다. 단테, 단테, 단테, 단테...애쉬는 분노를 담아 단테라는 이름을 몇 번이고 작게 반복했다. 그리고 그의 과할 정도로 사랑해주는 가족들. 그들을 보고 있노라면 단테가 다섯 살도 못 넘긴 어린아이라도 되는 것 같다.
문득 단테가 아니라 자신이 정말로 어렸을 때가 떠올랐다. 얼마큼 어렸을 때였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누군가 납치되었다가 무사히 구출되었다고 TV에서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눈을 팔로 가린 채 소파에 누워 있었다. 식탁에 앉아 세일로 산 스페셜 K를 열심히 입 안으로 퍼 넣던 그는 아버지한테 물었다.
“아빠, 나도 저렇게 납치되면 구해줄 거야?”
아버지는 자고 있는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눈을 가린 팔을 슬쩍 들어 올렸다. 그 때부터 매니저 형이 말한 잔뜩 날서 있으면서도 어쩐지 상처받은 눈을 가진 아이로 자란 것 같다.
이것보다 훨씬 최악이었던 때도 있었다. 같은 멤버였던 아인의 몸로비 기사가 터진 날이었다. 그때의 아인의 표정은 잊혀지지 않는다. 다른 멤버들의 추궁하는 의도가 다분한 표정까지도. 다들 누군가가 영혼 스위치를 한꺼번에 꺼버린 표정이었다. 모두들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다시금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그것이 우리들이 함께 걷던 길을 갈림길로 만들어놓았다.
인터넷 기사를 덜덜 떨며 클릭하던 아인의 근육이 딱 좋게 붙은 팔은 어머니의 마른 나뭇가지처럼 깡마른 팔로 바뀌었다. 퀭한 눈으로 자신들을 바라보던 어머니는 그 불쌍해 보이는 눈조차 없으면 사람인 줄도 모를 것처럼 마른 나뭇가지에 가죽을 대충 입힌 것 같은 모양새였다. 지젤은 애 낳을 힘까지 다 쥐어짜려는 것처럼 펑펑 울었고 나는 그저 얼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는 내 선글라스를 벗겨 햇빛을 받으면 황금처럼 반짝반짝 빛난다며 좋아했던 내 눈을 보고 싶어하는 눈치였지만 팔을 들어 올리지 못했다.
돈 걱정 하느라 고민할 여유도 없는 사람이 수두룩한데, 자기 싫어한다고 앓다니 정말 복에 겨웠군. 상황 때문인지 자기가 생각해도 이기적이다 싶을 정도로 단테에 대해 좋은 감정이 들지 않았다. 그게 다 말 안 해도 챙겨주고 떠받들어줘서 그런 거야, 좀 험하게 다루라고. 점점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었다가 다시금 자괴감이 몰려들어 자이로드롭처럼 순식간에 기분이 가라앉는다.
우울하다. 쓸데없는 생각만 느네. 그렇게 머리 좋은 건 아니면서 이런 건 잘도 기억하는 걸 보니 누가 말한 대로 쪼잔한 게 맞는 모양이다. 애쉬는 벌레 쫓듯이 신경질적으로 담배 연기를 휘휘 휘젓더니 결국 방에 돌아왔다. 침대에 뒤로 다이빙한다. 침대 좋은 건 마음에 든다.
최대한 일찍 일어나서 식사 전에 빠져나와야겠다. 여기에서 제일 가까운 맥도날드에서 아침을 먹어야지. 그의 어머니가 햇빛에 황금빛으로 반짝인다며 칭찬했던 눈이 감겼고, 저택은 비로소 조용해졌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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