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 언제쯤 이 소모전을 끝낼 수 있을까.
아니, 사실 소모되는것은 자신뿐이고, 자신에게서 빠져나간 것들은 그의 양분이 되니까 엄밀히 말하자면 소모전은 아닌 셈이다.
뻑뻑한 눈꺼풀을 느리게 깜박거린다. 방금전까지 격렬한 두통에 시달렸던 탓에 머리는 멍하고, 몇날 며칠을 울기만 한 것 같은 지끈거림이 느껴졌다. 그러나 눈가는 한없이 건조하고- 그는 웅크린 자세 그대로 느리게 숨을 골랐다. 긴장을 늦추지 않고 조용히 숨을 죽인다. 지금 네가 있는 곳이 지옥이라는것을 일깨워주는듯한 끔찍한 두통은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이제 다 끝났나 싶어 조금 긴장을 풀라치면, 이것봐- 또다시 뇌를 헤집으려 달려드는 것이다.
고작 두통일 뿐이라고 속으로 중얼거려보아도 이내 그런 사소한 사고조차 갈갈이 찢긴 채 말려들어간다. 이를 악물고 머리를 쥐어뜯어보지만 이 끔찍한 고통은 덜어낼 수 없다. 그저 헛숨을 들이쉬며 머리를 이불에 처박고 온 몸을 경직시킨채 관절이 까드득 소리를 내도록 웅크릴 수밖에.
온몸의 근육이 경련을 일으키고 관절은 불협화음을 낸다. 악문 잇새로 새어나오는 신음소리는 이불에 막혀 밖으로 흐르지 않고, 흐른다 해도 자신의 귓가에조차 닿지 않을 터였다. 머릿속을 내달리는 둥둥거리는 거대한 고동에, 맥박에, 온 몸이 내지르는 불협화음에 만약 닿아도 들을 수 없을 테지만 그는 더욱 웅크려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게 이불 깊숙히 얼굴을 묻었다.
혹시라도 자신에게서 새어나올 작은 신음소리를, 고통스러운 숨소리를 밖으로 흘리고 싶지 않았다. 아무도 들을 수 없고 들을 이라고는 자기자신 뿐이었지만 일말의 가능성조차.
호흡이 점점 거칠어지고, 막지 못해 고통스러운 신음이 간헐적으로 튀어나온다. 뼈를 씹어삼킬 기세로 이를 악물어보지만 그 작은 틈새로도 고통은 새어 흐르고 견고히 둘러 막았다 생각한 이불은 그것을 막아주지 못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쿠로코는 더이상 새어나오는 신음에 신경을 쏟을 수 없었다. 뇌가 큰 종 속에 들어있는 것 같았다. 거세게 내려치는 괘종소리가 두개골 안에서 마음껏 활개친다. 온통 제멋대로 날뛰며 뇌를 헤집고, 헤집어진 신경은 척수를 타고 온 몸을 내달려 손가락 끝까지 곱아지는 통증을 선사했다
-당신이 잘못한 거예요.
어떤 신체적 문제도 없이 발생하는 기이한 두통. 육체적으로는 몸이 조금 허약한 것을 빼면 작은 문제도 병도 없는 깨끗한 상태인데 이렇게 종종 두통으로 시작하여 온몸이 뒤틀리는 통증을 겪는 기이한 환자. 많은 병원과 의사를 거쳤지만 어디에서도 누구도 그 원인을 알아내지 못했다. 다만 의심할 수 있는 건 오직 정신적인 문제 뿐으로- 이것은 그에게 정신병력이 있어서가 아닌 일종의 강박에 의한 스트레스성 통증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는 증상이었다. 드물긴 하지만 신체가 절단되었을 때 겪는 환상통과 비슷하게 정신적 스트레스만으로도 원인불명의 통증을 호소하는 환자들의 사례를 들어 넘어갈 수밖에 없는 그런. 신체결손에 의해 일어나는 환상통과 달리 훈련이나 자기암시로도 증상을 완화시킬 수 없고, 또 그런 드문 환자들 중에서도 쿠로코- 그의 증상은 그 원인이 어디에서 오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일으키는 일을 사전에 차단한다는 것조차 통하지 않았다. 결론은 발작이 일어날 때마다 그저 버틸 수밖에 없다는 것.
그러나 쿠로코 테츠야는 자신의 이 고통이 어디에서 기인하는지를 알았다. 의사들에게는 말하지 않았던 어떤 한 삽, 그대로 고이 떠낸 그것을 그는 자신의 품안에 숨기고 절대로 내어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의사들은 기이하게 도려내진 그 상처를 발견하긴 했지만 그것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일어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잔뜩 굽어진 등이 옷 위로 도드라진 척추를 내보이며 고통스럽게 경련을 일으킨다. 머리를 움켜쥔 손끝이 두피를 긁어 기어이 피를 본다. 고통을 참기위해 악다문 턱관절에서 까드득, 불안한 뼛소리가 울려퍼지고, 꺽꺽 들이쉬지도 내뱉지도 못하는 호흡이 얼마나 이어졌을까. 간신히- 통증이 사라진다. 이번에는 진짜로 끝이었다. 발작이 가라앉았다.
그러나 쿠로코는 여전히 곱아진 몸을 펴지 않았다. 펼 수 없는것에 더 가까웠다. 장시간 긴장하여 수축해 움츠린 몸은 단단히 굳은 채여서 호흡을 이어가기 위해 이불속에 파묻은 얼굴을 돌리는 것조차 할 수 없었으니까. 폐와 심장이 모자란 산소를 더 빨아들이기 위해 발악하고 있었지만 쿠로코는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대로 굳어서, 두피를 쥐어뜯던 손가락만이 살짝 벌어졌을 뿐이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12년, 긴 시간이었다. 중 2의 어느날 그를 처음 만났고 그것은 불꽃같은 첫사랑이 아니었다. 다만 봄날 여린 나뭇가지 끝에서 빼꼼히 고개를 내밀던 연둣빗 새싹같은 고운 감정이었다. 흩날리는 민들레 솜털같이 보드라운 애정이었다. 그러나 그런 곱고 보드라운 애정을 그- 키세 료타는 아무렇지도 않게 뿌리채 뽑아 말려죽이고, 솜털은 모두 낚아채 초에 불태웠다.
그가 사랑에 빠진 남자는 자신에게 향하는 애정에 매우 민감한 사람이었다. 그는 순식간에 자신을 향한 쿠로코의 애정을 간파했다. 바라는 것 없이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그 여린 애정에 키세 료타는 아마 비틀린 미소를 지었던 것 같다. 그는 순식간에 쿠로코를 구석에 몰아넣고, 남자인 자신이 남자인 그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에서 오는 죄악감, 그리고 그것을 당사자에게 들켰다는 두려움에 떨고있는 어린 소년을 제 손아귀에 넣기 위해 입술을 핥았다.
좋아해서 미안합니다, 키세군. 나를 좋아해달라고 말하고 싶지도 않고, 너에게 피해를 주고싶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너를 좋아하는 이 마음을 멈출 수 없어요.
온 몸을 떨면서 간신히 자신을 올려다보는 물기어린 푸른 눈동자. 키세는 그것이 마음에든다고 생각했다.
좋아하는 마음이 쉽게 멈춰지지 않는다는 것을 나도 알고 있습니다. 좋아해도 괜찮아요. 아니, 좀 더 많이 좋아해주세요. 나는 나를 향한 애정이 싫지 않으니까요. 다만 나는 너의 애정을 모릅니다. 내게 너를 좋아할 것을 바라지도 말아요. 이것이 남들에게 알려졌을때를 떠올려봐요, 쿠로콧치. 너는 그저 조금 특이한 재능을 가지고 있는 일개 소년일 뿐이고, 나는 모두에게 사랑받는 모델이에요. 나를 좋아하니까, 내게 피해를 주고 싶지는 않겠죠?
유치하고 치기어린 말투, 그러나 고작 그런 몇마디 말에 묶여버릴만큼 당시의 쿠로코는 어리고 어리석었다. 설사 그것이 키세의 함정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더라도 무시해버렸을 만큼 그를 좋아하고 있었다.
어린 쿠로코의 키세를 향했던 보드라운 애정. 그 누가 보더라도 사랑스럽다고밖에 느낄 수 없었을 소년의 풋풋한 감정. 그것을 받는 이가 다만 키세가 아니었다면, 그랬더라면, 그저 사랑하다 부딪히고 스러져가는 평범하고도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을 수 있었을.
이제 갓 피어오르던 어린 감정을 강제로 끌어올리고, 키우고, 또 키우고. 결국 모든것을 뒤덮어 다른것들은 태양빛도 양분도 한 방울의 수분조차 빨아들일 수 없게 만들어버렸다. 쿠로코 테츠야라는 한 소년의 가슴속에 남아있는 것은 오직 키세 료타를 향한 사랑뿐이도록 그를 야금 야금 좀먹고 야금야금 키워서.
목과 가슴이 타들어가도록 고통스럽던 것은 가라앉았다. 대신 의식이 드문드문 끊어지기 시작했다. 머리카락 사이에 얹어져 있기만 했던 손이 툭 떨어져 머리 옆을 짚었다. 희게 질리고 파랗게 핏줄이 드러난 마른 손이 이불을 밀어내고, 하얀 천 위에 붉은 자국이 점점이 새겨진다.
잘게 떨면서 굳어있던 마른 등이 천천히 옆으로 넘어갔다. 몸통이 넘어가니 자연스럽게 목도, 고개도 움직임이 생긴다. 웅크린 자세 그대로 몸을 옆으로 누인 쿠로코는 그제야 서늘한 공기를 들이키며 모자란 숨을 채워냈다.
그렇게 악을쓰며 괴로워한 것이 거짓인 것처럼 검고 푸르기만 한 가라앉은 얼굴이 드러난다. 잔뜩 충혈된 눈은 눈물에 젖어 있었지만 그 눈가 어디에서도 축축함을 느낄 수는 없었다. 젖어있지만, 건조하다. 초점이 잡히지 않는 푸른 눈동자는 한 점 티끌없이 맑기만 하다. 맑기만 하다. 너무 맑아서 기이하다.
딱딱하게 굳어있던 관절이 조금씩 풀어지면서 쿠로코의 몸이 침대위로 천천히 늘어졌다. 우릿하게 올라오는 통증에 그는 옅은 한숨을 내쉬고, 그때까지 악물고 있던 턱에서도 천천히 힘을 뺐다. 자주 이를 악무는 탓에 약해진 턱과 치아가 시큰거리기 시작하고 입안에 비릿한 침이 고였다. 맨손으로 뇌를 쥐어파는듯한 통증은 사라졌지만 언제나 후유증처럼 따라오는 지끈거리는 두통이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다시 한번 가벼운 한숨. 창에 꿰뚫리는 듯한 고통이 가라앉고 뒤이어 시작되는 후유증을 느끼면서 이번 발작의 원인을 떠올린다.
-당신 때문이야.
경멸을 숨기지 않았던 그 목소리. 뒷목을 찍어누르고, 이젠 발버둥조차 치지 않는 마른몸을 강제로 열어 그저 배설할 뿐인 그 행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제 좋을대로 헤집어놓고도 모자랐던 건지 전혀 사정봐주는 것 없이 걷어차였다. 구둣발이 아니라서 다행, 이라고 생각했던가.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딱 한 번, 그에게서 벗어나고자 발버둥쳤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결국 발버둥으로 끝나고 말았던 단 한번의 도망. 그리고 그 이후로 쿠로코는 더 이상 그를 벗어나고자 하는 시도를 하지 않았고 키세는 쿠로코에게 폭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