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러렐: 애쉬와 단테의 이야기] =1= 외면
[외면]
“오 나의 천사, 사랑스러운 내 아가!”
“내 아들이다, 저리 비켜!”
“내 동생이야, 아빠야 말로 저리 비키시지?”
“내가 낳았다!”
“낳았다고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건 아니지 어머니.”
“이틈에 방에 올라가자, 천사야. 이리와.”
시끌벅적. 외지로 촬영을 다녀온 날이면 언제나 벌어지는 눈앞의 광경은 익숙한 것이었다. 인식하지 않고 있던 미묘한 긴장감이 스륵 풀리는 느낌도 나쁘지 않았다.
자신을 먼저 끌어안고자 투닥거리는 가족들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큰형이 슬그머니 손을 붙잡고 끌어당긴다. 손에 들고 있던 작은 가방은 어느 샌가 형에게 넘어가있었다.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형은 손이 참 빨랐다. 형은 내가 한 박자 느리기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의식하지 못하는 부분에서 일어나는 일이니까 빠르다고 느껴질 수밖에.
오랜만에 돌아온 내 방에 들어와서 형이 앉혀주는 대로 침대에 앉았다.
미리 준비되어 있던 물수건으로 얼굴을 닦이고 손을 닦이고, 발을 닦아준 형이 다시 몸을 훌쩍 들어서 바르게 눕혀주고 이불을 덮어준다.
나와 비슷하지만 똑같지 않은 형의 올리브색 눈을 가만히 올려다보니 ‘피곤한 거 아니까 얼른 한숨 푹 자고, 일어나서 같이 저녁을 먹자’고 웃으며 말해 와서 고개를 끄덕였다.
현관에서의 소란스러운 맞이함, 그리고 큰형이 방에 데리고 올라와서 간단하게 몸을 닦고 토닥토닥 재워주는 것은 아주 어릴 때부터 쭉 해왔던 일이었다.
성년이 지난지가 언젠데 아직까지도 애 취급하느냐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냥 편하다. 이마를 가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는 형의 손을 붙잡으니 웃으며 코끝을 살짝 쥐어온다.
“잠들 때까지 옆에 있어줘?”
조금 졸리다. 고개를 끄덕끄덕하니 웃으면서 눈을 감으라고 손으로 슬쩍 눈꺼풀을 내리누른다. 얌전히 따라 눈을 감고, 토닥토닥 가슴을 두드려주는 손길에 천천히 잠에 빠져들었다.
따뜻한 온기가 가슴을 두드릴 때마다 몽실몽실하게 온 몸으로 퍼져나가는 기분이 든다.
문득 가족들의 손과는 다르게 차가운 손이 떠올랐다.
맡
은 역할에 걸맞게 체온이 낮은 그 손, 그러나 닿아오는 감각은 형의 손과 다르지 않았다. 차갑지만 차갑지 않아- 가슴을 토닥이는
형의 팔을 붙잡고 조금 웅크렸더니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애교가 늘었네, 우리 천사’ 라고 말해준다.
잠에서 깨어난 것은 어슴푸레하게 노을이 방 안을 적실 무렵이었다. 누운 채로 눈을 끔벅거리다가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형이 켜두고 나간 듯한 베이비 모니터가 깜박깜박 작은 불빛을 비추고 있었다. 내가 잠들었을 때 억지로 깨우지 않는 가족들이 애용하는 물건이라 낯설지는 않았다.
가만히 보고 있으니 노크하는 소리가 들리고, 유모와 큰누나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엄마만큼 나이가 많은 유모는 다정하게 잠에서 덜 깬 내게 키스하고 몸을 일으켜준다.
누나는 일어난 나를 꽉 끌어안고 양 뺨에 립스틱 자국이 진하게 남도록 키스를 퍼부었다. 방에 딸린 욕실로 가서 세수를 하고 나오니 유모가 갈아입을 옷을 준비해주어서 그것으로 갈아입었다.
양 팔에 두 여인을 끼고 식당을 향하면서 누나가 저녁에 가족들과 자쿠지에 가자는 말을 꺼낸다. 고개를 끄덕끄덕 그러고마 하고 도착한 식당에서는 또 식사 이전에 가족들에게 순서대로 안겨 키스세례를 받았다.
누나의 남편과 큰형의 부인, 어린 조카들, 막내 형의 애인에 할머니 할아버지 외할머니까지 모두 모여 있어서 식탁에 앉기까지는 조금 또 시간이 걸렸다.
외할머니가 데려온 제빵사의 빵이 굉장히 맛있었다.
보들보들한 속살을 뜯어먹고 옆에서 아빠가 내미는 포크에서 고기요리를 받아먹었다. 그걸 보고 조카들이 조그마한 손으로 이것저것 삼촌 이거 먹어, 이거 먹어 하고 내미는 것들도
하나씩 받아먹으면서 조금 시끌시끌한 식사시간이 흘러갔다. 입가에 묻은 소스를 닦아주겠다고 벌떡 일어난 막내 형과 누나가 티격태격하고 매형과 막내형의 애인이 한숨을 쉬고,
그 사이에 할머니가 다정하게 냅킨으로 입가를 훔쳐 주셨다.
다시 입 앞에 들이밀어진 해산물을 받아먹으면서 또 잠깐, 떠오른다. 할머니처럼 다정한 손길은 아니었지만 그러나 거칠지도 않았다.
아이람 소령… 란 칭씨와 조금 공방을 주고받는 장면이 끝난 후에 끈적끈적한 손을 보며 곤란하게 서 있었더니 물티슈를 뽑아서 슥슥 닦아줬었다.
그리고 시끌벅적한 주변을 뒤져서 내 매니저를 찾아낸 후 데려가서 씻기라며 등을 떠밀었었지. 입안에 든 해산물을 다 씹어 넘기자 이번에는 새큼달큼한 샐러드를 입가에 대어줘서 또 낼름 받아먹었다.
누나가 가자고 했던 자쿠지는 누나의 새 저택에 꾸며진 곳이었다. 우리 천사가 가끔 와서 이용해주면 기쁠 것 같아서 이렇게 꾸며봤어(하트) 라고 말하는 그곳은
파르테논 신전의 대리석 기둥을 일부러 무너뜨려 쌓은 것 같은 모양새로, 백색 대리석과 넝쿨 모양의 프레임, 아이보리색 리넨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뭉글뭉글 피어오르는 수증기와 백색 일색인 배경이 어우러져 구름 위에 둥둥 떠 있는 기분을 느끼게 했다.
어린 조카들이 대리석을 깎아 만든 미끄럼틀로 달려가고 난 후 장미 꽃잎을 잔뜩 띄운 따뜻한 물에 들어가 앉았다.
할머니 두 분이 양옆에 앉아서 장미향이 듬뿍 베인 물로 얼굴을 닦아주고 젖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주신다.
손을 붙잡고 촬영은 재미있었느냐, 사막이 더워서 힘들지는 않았느냐, 다른 배우들과는 친하게 지내고 있느냐, 사람들은 다 괜찮으냐,
늘 해오던 질문들을 조곤조곤 해 오셔서 열심히 끄덕끄덕 대답을 했다.
할머니들 안 보고 싶었냐고 하셔서 보고 싶었다고 대답했더니 예쁘다고 양 뺨에 키스를 퍼부어주셨다. 누가 더 보고 싶었느냐고 해서 둘 다 라고 대답했더니 우리 손주는 정치도 잘 한다며 소녀처럼 소리 높여 웃으셨다.
할머니들이 집안에서 제일 힘이 셌기 때문에 두 분이 내 곁에 붙어 있을 때는 잘 다가오지 않는 할아버지가 슬그머니 나는 안 보고 싶었느냐고 하셔서
할아버지도 보고 싶었다고 했더니 환하게 껄껄 웃으시며 그럼 그렇지 역시 내 손자야! 라고 했다가 할머니께 물벼락을 맞았다.
조금 떨어진데서 애인과 함께 그 장면을 보고 웃은 작은 형이 촬영장은 어떻더냐고 물어서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자 형이 귀엽다고 외치며 다가오려고 훌쩍 뛰었다가 애인에게 수영복 뒤춤이 잡혀 저지당했다.
그리고 그 앞을 아슬아슬하게 할아버지의 발차기가 스쳐 지나갔다. 아쉽다며 입맛을 다시는 할아버지께 이겼다는 미소를 지어보이는 형의 애인이 대단해 보였다.
“형이 드라마 다 챙겨보고 있는데 그 아얄이라는 고양이 아가씨 역할을 맡은 배우가 페일이랬나? 주근깨가 귀엽던데! 빨간 머리는 역시 매력ㅈ… 아, 아, 에이라! 하지마, 아파!”
“애인을 옆에 두고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댄? 응?”
“헙…….”
물속에서 옆구리를 꼬집힌 형이 몸을 비비꼬며 입을 막고 아픔을 상쇄시키는 동안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이 재밌다고 깔깔 웃으시며 작은 형의 흉을 보신다.
얌전히 고개만 끄덕끄덕 하고 있었더니 형이 상처받은 눈을 해서 조금 외면했다.
“배우들도 다 잘 생겼고, 물론 우리 천사가 제일 예쁘지만, 여배우들도 다 예쁘고 귀엽던데. 아, 물론 우리 단테가 제일 예쁘지만. 좋아하는 사람 안 생겼어?”
“로라라는 아가씨도 참 참하게 생겼던데.”
“로라는 안돼, 그 아가씨 보기보다 나이가 너무 많아. 단테보다 열 살이나 연상이야.”
“그렇게 안 봤는데… 그럼 페일이란 아가씨는 어때? 스무살이고, 주근깨가 아주 매력적인데.”
“맬린다라는 여자아이……는 안 되겠구나, 하하, 하하.”
대체 뭘 말하고자 하는 걸까. 가만히 바라보며 열심히 머리를 굴렸지만 결국은 답이 나오질 않아서 포기했다.
멀뚱히 보고 있자니 아이들이 노는 것을 보다가 온 누나가 웃으면서 ‘네게 좋아하는 여자가 생기지 않았을까 싶어서 저렇게들 말하는 거야’라고 대답해준다.
“그래, 천사야. 혹시……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거나 그러진 않았니?”
“이번에 촬영은 조금 길었고…… 굳이 배우가 아니더라도 스텝이라던가.”
“……?”
“그야 당연히 그 요망한 것을……이 아니라, 그, 그냥 우리 천사가 좋아하는 사람이 누군지 궁금해서 말이다, 하하하하하.”
무서운 기세를 풍기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던 작은 형이 애인의 물속 발차기에 맞고 휘청거리며 다급히 주저앉으면서 말꼬리를 흐렸다.
할머니들과 할아버지, 누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그런 작은 형의 말에 맞장구를 친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내 눈치를 보는 것처럼 어설프게 웃었다.
흐음.
한 쪽으로 기울이고 있던 고개를 반대편으로 갸웃- 했다. 그리고 장미 꽃잎이 둥둥 떠 있는 수면을 바라보며 조금 침묵했다.
가족들이 말한 목록에는 없었지만, 문득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저를 볼 때면 날카로워지는 눈빛, 촬영이 끝나기가 무섭게 어디론가 사라져 얼굴 보기도 힘들고, 저 멀리 발견해서 따라갈라치면 순식간에 휙휙 도망쳐버린다.
이레와 노바로 있을 때는 그렇게 다정하면서. 단테와 애쉬로 돌아오면 차가워져. 크루즈에서도……. 보디가드이자 수행원인 케빈이 내게 쌀쌀맞은 그 남자가 뭐가 좋아서 자꾸 다가가는 거냐고 잔소리 했지만…… 나도 모르겠다.
왜 나는 그를, 애쉬를 자꾸 쫒게 되는 거지? 안 보이면 찾으러 다니고 싶어지고, 보이면 매달리고 싶고.
내가 담배에 약한 걸 알고는 자꾸 달라붙으면 담배연기를 뿜어서 쫒아내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한숨을 쉬며 담배를 든 손을 멀리 놓고 나를 뜯어낸 다음, 도망간다. 도망가. ……내가 그렇게 싫은 건가.
그가 날 싫어하고 있다는 생각을 떠올리자 저절로 눈가에 눈물이 고인다. 코끝이 시큰해지고 자꾸 어딘가가 따끔따끔해져서 뜨거운 자쿠지의 온도가 힘들어졌다.
내가 생각에 잠길 때부터 조용해지던 가족들이 눈에 눈물이 고이자 당황하여 달래는 것에도 눈물은 자꾸자꾸 나왔다.
가까이 다가온 작은 형이 나를 들어 안고 밖으로 나갈까, 몸이 안 좋아? 라고 물어서 그저 고개만 끄덕끄덕했다.
뜨거운 물에서 나와 비치체어에 눕혀지고, 누나가 차가운 음료를 가져와서 조금 마셨다. 걱정스럽게 쓰다듬는 가족들의 손길에도 자꾸만 애쉬 생각이 난다.
나한테 쌀쌀맞고, 나만 보면 도망가는 애쉬도 ……그렇지만 도망을 가지 못할 때는, 내가 쫒아갈 때 걸음 속도를 조금 늦춰준다.
내가 가까이 있을 때는 새로 담배를 꺼내서 피우지 않아. 따라오지 말라고 화를 낼 때도, 내 몸을 밀쳐내는 손은 담배가 들리지 않은 손이다.
대사 외의 말을 거의 하지 않는 내 곤란을 가장 빨리 눈치 채는 것도 애쉬고, 체력적 문제보다는 스트레스에 약한 내 상태를 케빈 보다 먼저 눈치 채는 것은 촬영장에서 그가 유일했다.
애쉬는 차갑다. 그런데 다정해. 자꾸자꾸 도망가고 밀어내면서 왜 그렇게 다정한 거지.
나를 향한 가족들의 절대적인 다정함 외의 다른 호의는 받아본 적이 없다.
그들이 나를 부르는 별명- 헤르난데즈가 보물, 황태자, 자라지 않는 소년…… 말이야 좋아 보일지 모르겠지만 담긴 뜻은 비꼼이 가득하다는 것을 안다.
내가 타고난 것들이 차고 넘치도록 많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나를 질투하고 시기한다는 것도 안다.
순수한 호의로만 나를 대해줄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음도 알고 있다.
재력가의 집안에서 태어나 배우의 길을 걷게 된 것에는 여러 가지 복잡한 사정이 있었다.
몸값을 노린 수많은 납치 시도, 실제로 당했던 납치, 몹쓸 짓을 당할 뻔했던 일들. 아주 어렸을 때의 일이지만 바로 어제 일어난 일인 것 마냥 생생하게 기억한다.
네 가족 외에는 널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잖아, 이렇게 예쁘니 집안에서 마냥 싸고돌지, 돈을 노린 게 아니었으면 나도 너라는 게 있는지 몰랐을 거야.
경찰이 너를 찾고 있군. 네가 부잣집 아들이 아니었어도 그랬을까? 네가 금발에 녹안을 가지고 있지 않았더라도 그들이 너를 이렇게 찾고 있었을까?
낄낄거리며 냉소하던 한 납치범의 입에서 나왔던 말들은 내 삶을 완전히 비틀어 놓았다.
내게는 헤르난데즈가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주어졌던 삶의 플랜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몇 대를 이어온 재벌가, 명문가라고 부를 수 있는 수준이 되어버린 집안은 아무리 예뻐하는 아이라 할지라도 어릴 때부터 엄격한 교육을 받고 자라게 한다.
가문에서 정해준 순서로 가문에서 필요한 공부를 하고, 가문에서 원하는 미래를 살아가야한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그냥 비틀렸다고 밖에는 설명할 말이 없다. 가족들은, 가문은 나를 노출시키기로 결정했다.
가장 밝은 곳에서 가장 많은 눈이 지켜보게끔, 그 누구도 그 눈을 피해 내게 해를 끼칠 수 없게끔 만들고자 했다. 그래서 지금의 내가 만들어졌다.
모든 사람들이 나를 보고 있지만 아무도 손 댈 수 없는 헤르난데즈의 보물.
일과 공부는 철저하게 한다. 사람과의 교류는 그 두 가지에 필요한 것이 아니면 일절 하지 않았다. 틈을 보일 수 없었다.
대중의 눈앞이 아닐 때에는 수행원들의, 그들의 눈앞이 아닐 때에는 가족들의. 안전한 집안에서 잠이 들 때에도 기계의 눈이 항상 나를 지켜보고 있다.
지켜봐지지 않고 있는 느낌은 모른다. 몰랐다. 언제나 누군가가, 무엇인가가 나를 지켜보고 있기 때문에 시선이 느껴지지 않는 상태 같은 건, 몰랐다. ……몰랐다.
카테라의 촬영이 시작되고, 벌써 몇 회분의 방송이 나갔을 때쯤이었다. 그날의 촬영은 별 것 없었다. 모처럼 만의 느긋한 일상 신을 찍는 날이었다. ‘이레’는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고양이를 잡으러 깔깔거리며 사막의 거리를 뛰어다니고, ‘노바’는 ‘할아버지’와 젊고 예쁜 아가씨의 구두 수선비를 깎아주는 문제로 티격태격하는, 그런 장면.
‘의뢰자의 고양이’는 유도당한 대로 노바네 수선가게 앞을 지나 달려가고, 이레는 그 뒤를 쫓아가다 노바와 할아버지에게 인사를 하며 스쳐 지나가기만 하면 되었다.
-이것 봐, 또 장부가 안 맞잖아! 이 구두 맡긴 사람 예쁜 여자지, 그렇지?!
-내가 내 수선비 깎아주는 것 가지고 왜 너한테 잔소리를 들어야 하냐 손자놈아!
-할배가 자꾸 그러니까 가죽집에 대금 치르는게 늦어지잖아!
-아하하, 오늘도 노바한테 혼나고 계시네요, 할아버지!
-앗, 이레! 이것 봐, 아주 나쁜 녀석이야! 손자놈이 할아버지한테 바락바락 대들고!
-이 할배가……!
이어서 대본대로 노바는 할아버지의 시가 상자를 압수해서 이걸로 잔금 치르고 올거야! 라며 머리위로 번쩍 들어 올리고, 자그마한 키의 할아버지가 폴짝폴짝 뛰어서 잡으려고 애쓰고……
이레는 그런 그들에게 고양이 잡아다 주고 난 다음 다시 놀러온다며 스쳐 지나가고. 그냥 거기에서 끝낼 수 있는, 별다른 예행연습이 없어도 한 번에 오케이 사인이 떨어질 수 있는 그런 편하고 단순한 장면이었다. 그런데……
조손을 지나쳐서 고양이의 뒤를 쫓아 달리다가 갑자기, 멈췄다. 왜 멈췄는지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그냥 가만히 멈춰 서 있었다.
감독님과 스텝들이 웅성거리고, 케빈이 급히 달려와 내 상태를 살폈다. 어디가 아프냐, 뭐가 잘못 되었느냐 계속해서 질문을 던지는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내가 조금 이상하다는 것을 느낀 케빈은 잠시 쉬어도 되겠느냐고 감독님께 양해를 구했고, 멍하니 멈춰선 나를 들어 안아 쉴 자리로 옮겨 주었다.
그러나 가던 도중, 갑자기 멈췄던 것과 마찬가지로 나는 또 갑자기 움직일 수 있게 되어서 다른 사람들의 걱정 속에서 다시 그 장면을 연기했다.
이번에는 지정된 장소까지 달려가는 데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어서 그냥 몸이 좋지 않았나보다 하고 넘어갔다.
그리고 그 뒤로- 몇 번을 더, 그런 일을 겪었다. 그냥 갑자기 촬영 중에 몸이 멈추고, 연기를 하지 않고 있는 평소처럼 입을 꾹 다물어버린다.
한 번도 촬영 중에 말썽을 부린 적이 없는 내가 자꾸 맥을 끊어놓자 감독님도 스텝들도 배우들도 곤혹스러워 했지만 가장 곤란했던 건 나였다.
지금은 일 하는 중인데, 그런데 그냥 몸이 멈춰버려. 이상해. 이상해. 정말 이상했다. 이런 일은 겪어 본 적 없어. 아냐, 알고 있는 것 같기도 해. 뭐지? 왜지?
……어디서?
이유를 알게 된 것은 슬슬 감독님의 인내심이 바닥이 난 것 같다고 생각할 때쯤이었다.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무는 것은 오직…… 집에서. 집에서 뿐이다. 헤르난데즈가의 저택, 아니면 큰형의 집, 다른 가족들이 집과 그들의 시선 아래 있을 때 뿐. 긴장감이 풀어져버릴 때 뿐.
그렇다면 왜 긴장감이 풀어지는 거지? 왜냐하면 가족들의 품 안이니까, 그래도 되는 곳이니까, 타인의 시선이 느껴지지 않는 곳이니까. 그런데 여기는 촬영장이야, 모두들 지켜보고 있고 카메라도 돌아가고 있다.
그런데 왜 나는 그런 촬영의 한 가운데에서 갑자기 타인의 시선이 사라져버렸다고 느낀 걸까. 왜일까.
……이유를 알게 된 것은 그 순간.
이유를 고민하며 잠시 멍하게 서 있던 사이, 사라졌던 긴장감이 순간적으로 확 되살아났다. 그리고 느껴지는 타인들의 시선과 무기물의 시선. 그저 의미 없이, 내게 던져지는 시선들을 따라 고개를 휙 돌리다가 눈이 마주쳤다.
노바의 분장을 하고 있어서 새파랗게 빛나고 있는 애쉬의 눈. 그의 시선. 찌푸려진 미간과 좋지 않은 감정이 담긴 매서운 눈매의 그 눈.
그리고 나를 보고 있던 그는 눈이 마주치자 곧장 불쾌감을 표시하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아예 몸도 같이 돌려 그 자리를 피했다.
그래서 알게 되었다. 그의 시선 때문이었구나. 보고 있다가, 사라지면, 그렇게 되는 거였구나.
그가 내게 행사하는 영향력은 단순히 그 시선을 벗어난 것만으로도 다른 모든 것들이 주는 긴장감을 풀어버릴 정도구나.
이상했다. 신기했다.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아예 그와 함께하지 않는 촬영은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문제가 생기는 것은 같이 연기하다가 그의 턴이 끝나고 아직 내 분량이 남아있을 때, 그가 나를 피해 시선을 돌릴 때였다.
내가 그것을 의식하고 난 이후부터는 조금 더 민감해져서, 나는 드디어 남들이(애쉬가) 나를 보고 있는 시선이라는 것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나를 보는 시선을 느낄 수 있게 되자 나를 보지 않고 있는 시선도 덩달아 자연히 알게 되었다.
그는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 딱히 싫어하지도 않았다. 다만 날 불편해하고, 그다지 엮이고 싶지 않아한다.
솔직히 배우로서 그의 태도는 결코 좋다고 말할 수 없었지만 나는 그의 그런 태도가 썩 달갑게 느껴졌다.
나를 불편해하는 마음이 그 시선에서 몸짓에서 여과 없이 흘러나온다.
솔직해. 그대로 와 닿아. 종류가 어떻든 간에 그의 불편해하는 모습에는 일점의 가식도 존재하지 않아.
그래서 기뻤다. 모두가 나를 보고 있을 때, 너는 나를 보고 있지 않아서.
수없이 많은 시선들 틈에서 너만 나를 외면하고 있어서.
네가 나를 보지 않고 있을 때 나는 타인의 시야에서 벗어나는 감각을 맛봐. 내가 비틀려버렸던 그날 이후로는 느껴보지 못했던 그 감각을, 나를 꺼려하는 너를 통해서 느낄 수 있다.
그것이 매우 기껍다. 다른 배우들이 나를 대하는 태도는 호감, 혹은 무관심. 그러나 애쉬는 호감을 표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관심이 없지도 않고, 싫어하지도 않으면서 좋아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고.
그 미묘한 단차가… 아주 미묘한 단차가 나는 좋았다.
일부러 그의 시선을 좇았다. 졸졸 따라다니며 나를 외면하려 애쓰는 그 모습을 보며 즐거웠다.
나를 향하는 감정을 한 장의 필터도 거치지 않은 채 분출하는 그 모습이 좋아서 그가 짜증을 내며 나를 괴롭히거나 대놓고 화를 낼 때에도 그저 졸졸 따라다니기만 했다.
나를 외면하는 그 순간이 좋아서, …외면하기 전에 나에게 닿는 그 시선이 좋아서.
“……댄.”
“천사야, 어디가 안 좋아? 응? 닥터 요한을 부를까?”
“…….”
“……일단은 방에 들어가서 좀 눕자. 마리, 가운 좀 가져다주겠어?”
“여기 수건. 물기부터 닦아.”
진짜 몸이 좋지 않은 건지 조금, 눈앞이 흐리고 소리가 울린다.
흐릿한 수증기, 걱정스러운 가족들의 얼굴.
형의 등에 업혀 옮겨지면서 깜박깜박 느리게 열렸다 닫히는 눈꺼풀 안으로 나를 외면하는 그의 모습이 흐리게 비친다.
“……애쉬…….”
“천사야?”
“…….”
모두가 보고 있는 나를 보지 말아줘. 나를 외면해. 좋아하지 않아도 괜찮아. 불편해 해도 좋아.
“열이 조금 오르는 것 같은데, 닥터를 불러야겠어.”
“크루즈 여행에 보내지 말고 푹 쉬게 두었어야 하는 거였는데!”
“빌어먹을 케빈놈은 대체 뭘 한 거야?! 윌리엄!! 윌리엄!! 케빈을 불러!”
“아가, 조금만 기다리면 곧 닥터가 도착할 거야. 조금만 더 깨있자, 응?”
그리고, 그리고 나를 봐줘. 모두가 보지 못하는 나를, 봐줘. 나를 외면하고, 나를 봐.
애쉬, 너라면, 너는, ……….
나를 피하고 있어? 나를 외면하고 있어? 괜찮아, 괜찮아. 고마워.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