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러렐 환상의 섬] ISLAND -치도님
ISLAND -치도님
문 명과 멀찍이 떨어진 섬에도 아침은 어김없이 찾아와 잠든 이들을 깨운다. 노바는 눈가를 찌르는 햇살에 끄응, 신음소리를 내며 눈살을 찌푸렸다. 아직 잠이 덜 깬 하늘은 창백하지만 빛이 곳곳에 찾아와 숲을 일으킨다. 노바는 눈을 느리게 끔벅이다 고개를 조금 들어 촉촉이 젖은 정경을 바라보았다. 너무 맑아 시린 기분이 드는 공기와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한 잎사귀들. 노바는 약만 제대로 챙길 수 있었다면 그나마 휴양 온 기분이 들었을 거라 생각하며, 다시 자리에 누워 병약한 자기 삼촌을 바라보았다.
자 기만치 큰 소년을 아기처럼 꼭 끌어안고 잠든 백작의 얼굴은 파리했다. 고요히 감긴 눈매는 번뜩이는 눈빛을 품고 있었지만 세월의 주름이 엷게 새겨져 성년이 안 된 조카와 대비되었다. 조카를 끌어안은 가는 몸은 안기는커녕 도리어 그 자신이 부러지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가늘었다. 노바는 문득 이렇게나 그에게 매달리는 자신에게 자괴감이 들었다. 지금은 자신이 환자를 챙겨야 할 상황이 아닌가. 얼음 침대에 누워있는 몸은 차갑지만 눈가는 뜨거워진다. 노바는 서리처럼 흰 한숨을 쉬고는 잠든 삼촌에게 머리를 기댔다.
어 릴 적부터 자신을 유난히 예뻐했다던 삼촌. 그러나 그 애정이 무색하도록 시간에 그를 희미하게 지우는 건 빨랐고 비어 있던 시간의 벽은 두꺼웠다. 노바는 행동에서 노련미가 뚝뚝 떨어지는 이레 백작과 자신을 한없이 귀여워해주던 삼촌을 갑자기 이어 붙이기가 힘들었다. 그저 서먹하게 인사를 나누었을 뿐이었고, 대답에도 숨기지 못한 어색함이 묻어났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비행선의 불시착. 그리고 쿠키 하나 사먹을 수 없는 야생에 떨어졌다. 이유 없이 일어난 오른팔의 불꽃은 덤이었다. 노바는 처음 능력을 얻었을 때를 떠올렸다. 갑자기 생긴 능력에 당황하던 자신의 불붙은 손을 쥐어주며 말해주었었다. 괜찮아, 뜨겁지 않아.
노 바는 희게 질린 그의 손마디를 매만졌다. 푸른 불길이 손가락을 태울 것처럼 일렁였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그의 능력으로 온도를 내린 탓이다. 마치 불에 괴로워하는 조카를 돌보려는 것처럼 백작은 온도를 조절하는 능력을 얻었고, 태어났을 때부터 해온 것처럼 능력을 자연스럽게 다루었다.
그 러나 그렇게 아끼는 것 치고는 누구나 남남이라 생각할 정도로 닮지 않았다. 얼음 위에서 금빛과 은빛으로 부서지는 머리칼과 차분한 눈매, 질투의 괴물처럼 선명한 녹색 눈동자는 어떤가. 무튼 빈말로라도 노바의 부숭부숭한 짧은 머리와 샐쭉하니 치켜 올라간 눈꼬리와 닮았다고 하기는 힘들다.
성 정 역시 그러하다. 뾰족하지만 서툴게 깎인 연필 끝을 연상시키는, 성질 급하고 예민하지만 아무에게나 정을 묻히는 어린 귀족 노바. 예의바르고 친절한 신사의 가죽을 둘렀지만 밤바다처럼 검고 차가운 성정의 이레 백작. 소년의 설익음과 중년의 원숙함이라고 단정 짓기엔 기질적으로 다르다.
그 러나 노바는 자기 삼촌을 친아버지보다 더 가깝게 느끼고 있었다. 비단 이 섬에 떨어져서 그밖에 의지할 곳이 없어선 아니었다. 친아버지가 자신을 별로 달갑게 여기지 않아서여도 아니었다. 백작이 몸을 뒤척이자 노바는 손을 떼고 다시금 눈을 감았다.
그 자신도 유모나 다른 오래된 하인들에게서 들은 얘기지만, 그의 아버지도 처음부터 노바를 멀리했던 건 아니었다. 그 역시 첫 자식이 예쁘고 귀여웠다. 자신을 이어받은 구석이 별로 없는 외모지만 잉크처럼 검은 머리칼도, 선명한 스펙트럼의 파란 눈도 우리 색시 같다며 안고 살던 게 노바의 아버지였다. 언제 자라서 자기 작위를 물려받을까, 언제 그때가 올까 노래처럼 말하고 다녔다.
하 지만 처남 이레 백작이 아이를 예뻐하던 게 불씨가 되었다. 원래 누이의 결혼을 달가워하지 않았던 터라 왕래가 없었던 그가 노바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이다. 때문에 처남이 껄끄러웠지만 그렇다고 처음부터 의심하지는 않았다. 물론 내 자식이니 예뻐 보이겠지, 멋지게 키워서 건방진 네 놈 코를 눌러주마. 이런 식으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갈수록 조카를 제 자식처럼 여기는 모양새가 영 아니꼽게 느껴졌다. 게다가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게 하려는 것처럼 아내만을 닮은 아들. 그의 아버지는 압박감을 느꼈고, 노바가 슬슬 말귀를 알아먹을 즈음에는 정말 내 아이가 맞냐고 아내와 싸운 적도 몇 번 있었다. 첩을 들일 생각까지 했었다.
의 미 없는 논쟁은 노바의 동생들이 태어나면서 일단락되었다. 남녀 쌍둥이였다. 한명은 아버지의 작위를 잇고, 한명은 가문의 관계를 돈독히 할 것이다. 어머니는 자비로운 신께서 우릴 돌보시는구나, 라며 둘을 끌어안았다. 노바는 자비로운 신께서 왜 아버지의 미움을 주셨는지 몰랐지만, 대신 삼촌을 주셨나보다 하고 혼자 납득했다. 그걸 아는지 이레 백작은 노바의 동생들에겐 꽤 엄격했다.
그 래도 노바는 동생들을 제법 예뻐했다. 작은 것들이 꼬물대는 걸 보고 있노라면 삼촌이 말했던 애틋하고 사랑스러워 눈물이 날 것 같은 감정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하나로도 예뻐 죽겠는데 둘이나 주다니! 역시 신은 착한 어른이었다. 아장아장 걸어와 안길 때는 애 닳겠다며 유모가 뺏어들 정도로 뽀뽀해 주었었다. 무엇보다 잠시나마 아버지의 자식이라는 소속감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반대로 아버지가 노바를 견제하기 시작했다. 동생들과 놀아주는 걸 발견하면 공부해야 된다며 떼어놓기 바빴고, 으레 나이가 몇인데 애들이랑 노냐는 잔소리가 따라왔다. 결국 그 아이들과도 점점 멀어졌다.
노 바는 자기 아버지와 눈이 마주치기가 싫었다. 그럴 때면 아버지는 왜 남의 집에 와 있냐는 눈초리로 쏘아보다가, 한때 제 아들이 아니라 의심한 데다 화풀이까지 했음이 미안해 조금 눈알을 굴리다가, 제 아들을 뺏어간 이레 백작이 있는 쪽을 바라보는지 눈빛이 먼지처럼 뿌옇게 가라앉았다. 노바가 어릴 적 기억이 희미한 건 언젠가 떠날 곳임을 알아서였을까. 그는 결국 아버지에게서 등을 돌리고 니게르의 후계자가 되기로 결정했다.
그 렇게 되니 더욱 집 안의 공기가 숨 막히게 불편했다. 그 안에서 버틸 수 있었던 건 어머니의 조용한 응원과 삼촌으로부터 받는 가르침이었다. 물론 그 가르침들이 결코 쉬운 건 아니었지만 으레 그렇듯 뒤에서 받쳐주는 손이 있었기에 버틸 수 있었다. 그에 비하면 아버지와의 불화 따위, 둘 다 성격이 어려워서 안 맞는 거겠거니 하면 그만이었다. 가르침을 받으면서 접한 이야기들은 호러소설보다 끔찍한 것들도 있었기에 자신 정도면 양반이다 싶었다. 항상 삼촌이 뒤에서, 또는 옆에서 자신을 이끌어 주었다. 관심을 가지고 응원해주었다. 정말 내가 이 모든 걸 받아도 되는 걸까, 의심하리만치 큰 사랑.
-그런 삼촌을 남처럼 여겼다.
노 바는 옷깃을 부여잡고 품속으로 더욱 깊이 파고들었다. 휴양지로 떠나기 전 어색해하며 손을 내미는 자신에게 눈을 부드러이 휘며 웃어주었다. 어렸을 적, 자신과 눈이 마주치면 늘 그랬던 것처럼. 비행선 내에서 대화를 나눌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 웃음이 그렇게 후원을 해줬는데도 자길 불편해하는 조카에게 섭섭해도 다가가기 위해서였을 거라 생각하면 부끄럽고 미안하기 그지없었다.
움직임을 느낀 백작은 느린 숨을 내쉬며 눈을 떴다. 숲을 닮은 녹색 눈이 가늘게 뜨이며 내려다보자, 노바도 그의 품에 얼굴을 묻은 채 그를 올려다봤다. 조카의 눈가에 물기가 촉촉한 걸 발견한 삼촌은 살풋 웃으며 눈물을 닦아주었다.
“또 나쁜 꿈 꿨니? 왜 울고 그래, 스위티.”
평소라면 내 나이를 좀 생각해보고 스위티라고 부르라고 성을 냈겠지만, 오히려 언제나처럼 자신을 불러주는 모습에 안심이 된다. 노바는 흐느낌 섞인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삼촌.”
“왜.”
“돌아가시면 안 돼요.”
괜한 소리를 한다는 듯 후후, 느리게 웃고는 머리를 쓰다듬는다. 이대로 다시 잠들 것처럼 상냥한 손이다.
“징그럽게 살 텐데?”
노바는 무어라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대신 그를 품 안으로 더욱 꼭 끌어안고 느리게 숨을 쉬다가 한 마디를 꺼냈다.
“스위티는 그만둬요.”
“싫은걸.”
“칫.”
이 내 다시 눈이 감기기 시작한다. 잠꾸러기, 작게 키득대는 목소리가 귀 안을 굴렀다. 아니라고 부정하는 건지, 나름 애교라고 부비적대는 건지 노바의 고개가 잠깐 좌우로 움직였다가 다시금 천천히 숨을 쉬기 시작한다. 그의 삼촌이 부드럽게 등을 토닥이자 스르르 잠의 바다에 빠져든다. 영원히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잠들지만 또다시 깨어날 것이다. 그러면 그땐 삼촌과 무엇을 할까. 수면 위로 머리를 내놓고 고민해 봤지만 다시 일어나도 삼촌이 옆에서 웃어주는 것 이상은 떠오르지 않았고, 이내 완전히 잠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