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러렐 환상의 섬] 이레 삼촌과 조카 노바
섬에 떨어진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라는 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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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눈앞이 흐렸다. 몸 속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열에 눈이 빠질 것처럼 아파오고, 숨을 쉴 때마다 가슴 안쪽이 욱신거렸다. 자잘한 떨림이 느껴지는 손을 내려다보니 평소보다 희게 질려있어 보기에 좋지 않았다.
곤란해.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을 느끼자마자 떠오른 생각은 곤란해- 였다.
이곳에 떨어질 때 챙겨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수트 주머니에 늘 넣어 다니는 몇 가지 뿐으로, 진통제며 기타 상비약들은 다른 짐 속에 섞여 바다 깊은 곳에 녹아들고 있을 터였다.
약도 무엇도 없는 상태로 고립되었기에 이런 상황은 충분히 예견했었지만 그래도
……지금은 곤란했다.
“……삼촌……?”
“쉬…… 아직 날이 밝지 않았다. 좀 더 자도록 해.”
“응…….”
품안에 기대있던 노바가 조금 꼼질거리며 자세를 바꾸고는 다시 잠에 빠져든다. 짧게 다듬은 머리카락과 그 아래 곧은 이마를 내려다보고 있으니 속눈썹이 조금 팔랑거리다 이내 얌전해졌다.
내게 온전히 기대어 평온하게 잠든 아이를 내려다보며 속으로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른스러운 척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아이일 뿐인 조카에게 아픈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다.
노바가 나와 함께 시간을 보냈던 것이 벌써 오년 전이다. 일, 이년 전부터 조금씩 백작가의 후계자로써 배워야 할 것들을 밀어주고 있었지만 그 사이에 오간 것은 사람과 서신 뿐, 다시 만난 것은 휴양지로 향하는 비행선을 타기 겨우 이틀 전이었다.
병이 발병하고 그것이 깊어지는 과정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아이가 이런 상황 이런 장소에서 피를 토하는 삼촌- 유일하게 의지하는 어른의 아픈 모습을 보면 얼마나 충격을 받을 것인가.
시한부 인생이지만 조카가 내 모든 것들을 물려받을 때까지의 시간은 있다. 얼마의 시간이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귀족들이 몇이나 타고 있던 비행선의 실종이니 틀림없이 구조대가 찾아 나설 것이고, 우리들은 구조된다. 그때까지는 약이 없어도 충분히 견딜 수 있다.
다만 그 견딘다는 것은 내 스스로의 문제고 발작이라던가 병의 진행이 눈에 보이는 증후들의 경우는 어쩔 수가 없는 것이라서 죽지 않을 것을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어린 조카는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가뜩이나 이런 곳에 떨어져 불안정하기 그지없는 아이를 더 흔들고 싶지 않았다.
품안에 안겨 색색 잠든 아이의 온기를 느끼며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얼음으로 만든 침대는 푹신하진 않아도 내 마음대로 모양을 만들 수 있어서 다 큰 소년 하나를 끌어안고 반쯤 누운 자세도 별로 불편하지 않았다.
누군가는 어른이 다 된 애를 왜 그렇게 품안에 끼고 있느냐고 뭐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귀족의 몸가짐이 아니라고 말이다. 그러나 겉으론 멀쩡하게 다 커보여도 역시 내 눈에는 어린애일 뿐인데다 불시착의 충격 때문인지 노바는 혼자서 제대로 잠들지 못했다. 계속해서 악몽을 꾸고, 식은땀을 흘리며 잠에서 깨어난다. 품안에 끌어안고 다독거려 체온 안에서 재워야만 평온한 숙면을 취할 수 있기 때문에 –그리고 내 욕심에.
오년은 굉장히 긴 세월이었다. 내 허리춤에 닿던 자그마하던 아이가 어느새 쑥쑥 자라 나와 눈을 마주한다. 어릴 때 얼굴이 많이 남아있어 유달리 예뻐했던 그 아이가 나는 매우 기꺼웠지만 조카의 입장에서는 아마 이 아저씨는 누구인가…… 같은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싶었다. 서먹한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며 주춤주춤 다가와서 꾸벅 인사하던 모습으로 봐선, 어릴 적에 그토록 날 따르던 스스로의 모습을 별로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았으니까.
그러나 내게 그렇게 서먹하게 구는 모습조차도 귀엽고 사랑스럽게 보였다면 이건 병에 가까운 걸까. 케빈(보좌관)이 노바의 사진과 서신을 들여다보며 히죽히죽 웃는 날 보고 백작님 중증 변태같다고 그러지 말라고 했었는데. 아무튼 사진으로만 볼 수 있던 다 자란 조카를 이렇게 끌어안고 다독거릴 명분이 생겼는데 그걸 놓칠 멍청이가 어디 있으랴.
“…….”
치달아 오르는 통증을 속으로 씹어 삼키며 어린 조카의 가슴에 두른 팔을 좀 더 품안으로 끌어 당겼다. 움직임을 느낀 아이가 조금 웅얼거리며 내 목덜미에 뺨을 부비고 다시 색색 고른 숨을 내쉰다.
팔로 전해지는 숨을 가만히 느끼다 턱밑의 보송보송한 짧은 머리카락에 슬쩍 고개를 기댄다. 향수는 없었지만 매일 씻게 하고 잘 말려준 머리카락에서는 나쁜 냄새가 나지 않았다. 오히려 아직 아이가 작았던 시절 맡아보았던 젖내가 나는 것 같아 조금, 웃음이 난다.
노바, 사랑스러운 내 조카. 너는 알까. 너무 어린 나이에 작위를 물려받고, 사랑하는 누이를 불한당 같은 이에게 빼앗기고, 이를 악물고 더러운 물에 발을 담가야 했던 내가 태어난 너를 보는 순간 느꼈던 감동을.
그토록 싫어하는 이의 피를 반이나 타고난 너를, 그러나 세상 그 누구보다 사랑하던 누이의 피를 반이나 타고난 너를, 눈으로 보기 전까지는 어찌 대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해 방황하던 나를 너는 알까.
누이의 간곡한 요청에 네가 태어난 지 일 년이나 지나서야 간신히 만날 용기를 낼 수 있었다. 그나마도 사업차 들렀다며 바쁜 척 네 얼굴만을 슬쩍 보고 떠나려했었다.
하지만… 하얀 린넨에 싸여 까만 머리카락만 보송보송하게 드러나 보이던 자그마한 너를 보는 순간 나는 더 이상 말을 이어갈 수 없었다. 마치 사파이어와도 같이 찬란하게 빛나던 동그란 눈동자와 처음 마주했을 때는 숨을 쉬는 것도 잊었다.
어떻게 이다지도 사랑스러울 수 있을까, 어떻게 이토록 애틋할 수 있을까.
덜덜 떨리며 조심스럽게 내민 내 손가락을 꼭 움켜쥐던 네 작은 손, 그 자그마하고 따뜻하던 체온에 결국 나는 울어버렸었지. 어린 너는 그런 나를 따라 서럽다는 듯 엉엉 울며 내게 손을 뻗었다. 웃으며 밀어주던 누이에게서 너를 받아 안고, 내 목을 끌어안고 숨 가쁘게 우는 젖은 네 뺨과 뺨을 맞대고 한참을 그저 눈물만 흘리고 서 있었다.
내 머리카락을 쥐고 흔들며 섧게 우는 네 뺨에 입 맞추며 나는, 알았지.
네가 내 삶에 둘도 없이 귀중한 보물이라는 것을.
잔뜩 젖어 바닷물이 흘러넘치는 것만 같았던 너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세상 그 어떤 것보다 소중한 것이 너라는 것을 알았다.
-이 아이를 내 후계자로 삼겠어.
그 자리에서 단언하는 내 앞에서 누이는 조금 글썽이는 눈으로 웃고 있었다.
-네가 손에 쥐게 될 것들에 모든 이가 부러워하도록 만들어 주겠다.
확고한 목표가 생겼다. 힘이 없음에 당하는 것이 싫어서 그저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허우적대던 내게 방향이 생기고, 목적도, 그리고 목표도 생겨났다. 나는 그 자리에서 너라는 보물을 품에 안았고, 그리고 내 삶도 오롯이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긴 시간이 흘러갔지. 그렇게 작던 네가, 한 팔로도 거뜬히 들어 안고 그 뺨에 입 맞출 수 있었을 만큼 작았던 네가 어느 샌가 이렇게 컸다. 잘 자라주었다. 잘 자라고 있다. 나 때문에 생겨난 네 친아비와의 불화에도 불구하고 비틀린 곳 없이 잘 자라주었다.
나의 것들을 물려받기 위해 알아야만 하는 온갖 검은 것들을 마주하면서도 그것에 물들지 않고 여전히 꼿꼿한 네가 너무나도 장하다. 내가 얻은 병 때문에 시간이 촉박하여 몰아붙인 것들도 많았는데 그것들을 모두 따라와주어서 고맙다.
어슴푸레하게 밝아오는 사위에 주변에 낀 안개가 푸르게 물들었다. 고요히 잠든 아이의 머리카락에 입을 맞추며 눈을 감는다.
품 안의 체온, 내 품에서 평온을 찾는 아이의 심장소리. 나를 안식으로 이끄는 내 삶, 내 분신, 내 미래, 내 가장 소중한 보물. 눈물이 날 것 같다.
불꽃이 일렁이는 아이의 손가락을 더듬어 잡으니 귀찮다는 듯 손을 뒤로 빼며 웅얼거리기에 손을 떼어냈다. 떼어낸 손을 원래 위치에 두고 슬쩍 눈을 감는데, 이번에는 또 뭐가 불만인지 끙 소리를 낸 네가 더듬더듬 제 몸 위를 더듬어 기어코 내 손을 찾아내 손가락을 얽어오는 것에 그만 소리 내서 웃고 말았다.
웃는 소리에 다시 잠이 깰 것처럼 뒤척여서 얼른 안은 등을 토닥여주니 곧 깊이 잠들고, 그리고 나는 소리 내지 않고 흐뭇한 미소를 지은 채 아이의 이마에 입술을 댔다.
어느 새 속 깊은 곳에서 올라오던 불안한 통증은 모두 가라앉고 내 몸에도 평화가 찾아왔다.
혹여나 아이에게 좋지 못한 모습을 보일까 불안하던 것이 가라앉으니 슬그머니 졸음이 찾아든다.
가물가물 잠이 드는 와중에도 자꾸만 제가 밀쳐낸 내 손을 도로 더듬어 찾아 잡던 아이의 행동이 떠올라 비싯비싯 웃음이 새어나왔다. 이렇게 귀여운 짓을 하는데, 내가 어찌 너를 스위티라 부르기를 그만둘 수 있겠느냐.
기억해둘, 생각만 해도 웃음이 나올 즐거운 기억이 하나 더 쌓였다.
이렇게 하나 둘 쌓이는 기억들을 되짚어 보고 있자니 비행선 추락도 한 번쯤은 겪어볼 만하다고 생각하게 되어버린다. 아직 불안정한 나이이기 때문에 감정을 다스리기 보다는 정리하는 것부터 가르치고 있기에 이런 상황에 더욱 예민해지고 불안감을 느끼는 어린 조카에게는 못 할 소리지만.
그래도 이미 일어난 일이니 만큼 지금 상황을 견뎌낼 수 있도록 잘 다독여 주다 보면 괜찮아지겠지 싶어서 평소보다 더 집요하게 애칭으로 부르고 있으니까, 아마 곧 나아지지 않을까.
……그래도 지금처럼 이렇게 삼촌삼촌 찾으면서 품안을 파고드는 것도 참 좋은데 말이야…….
마주잡은 손에 조금 힘을 주어 꼭 쥐고, 천천히 잠에 빠져든다. 아마 즐거운 꿈을 꾸지 않을까. 아주 작던 너와 다시 만나는 꿈이라면 더 좋을 텐데- 라는 생각과 함께.